프롤로그 넷 중 둘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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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립 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사실상 도박이다.
문화 교류 목적으로 시행된 이 프로그램은 참여를 자원한 호스트 가정과 참여를 희망하는 학생을 연결한다. 호스트는 외국 학생의 홈스테이를 책임지며 1년 동안 미국 문화를 배우게 도와야 하고, 학생은 반드시 호스트 가족과 지내야 하며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

참여를 희망하는 학생은 자기소개와 희망 사항이 담긴 서류를 사전에 제출하는데, 프로그램 관계자는 제출된 이 서류를 호스트 자원자들에게 보여주어 선택을 하게 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관련자들에게는 결과만을 통보한다. 어떤 지역의 어떤 호스트에 배정이 될지 한국에 있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결정이 되면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물론 선의가 우러나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호스트가 많다.
따라서 1년간의 홈스테이 기간 동안 학생과 호스트의 관계가 돈독해져 친가족에 준하는 경우도 많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쪽으로 난처한 케이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한 학생은 호스트 부부가 끔찍하게 아꼈다.
변호사 남편과 의사 아내 부부는 로드 아일랜드에 살았고, 사진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저택에 거주했다. 이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낭랑한 목소리를 집 안에 울리며 여자아이가 찾아왔다. 부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아이였고, 아이는 자기를 친 딸처럼 아껴주는 또 하나의 부모님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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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아빠는 본인의 취미를 선물 같은 딸과 함께 했다.
경비행기에 태워 하늘을 날았고, 의사 엄마는 맛있는 음식으로 매일 저녁을 채워주고, 쇼핑을 같이했으며, 머리를 하러 같이 다녔다. 이 아이와 지내면서 호스트 부부는 주체할 수 없음에 무한한 사랑을 쏟아냈다. 계속 이어지는 영화 같은 소식들에 서울의 사무실에 있던 우리는 뿌듯했고 기뻤다. 급기야 이 부부는 일생에 걸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노라 사정을 하며 입양을 할 수 있을지 물어왔다. 입양이 불가하면 대학이라도 보내고 싶노라. 절절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한국의 가족을 생각하면 앞의 케이스가 긍정적이라 말할 수 없지만, 호스트와 돈독히 지내고 학교생활도 즐겁게 마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긍정적 케이스가 충분히 많았다. 명이 있으면 암도 있어 우울한 사례도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런 케이스는 프로그램의 태생적 문제점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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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학생으로 미국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과 이들을 원하는 호스트 간 수요-공급은 절대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따라서 기다렸다는 듯 선의의 사명감을 내세운 ‘재단’ 이 나타나 그 갭을 메웠다. 그리고 여기서 교육이 상품으로 둔갑하는 메커니즘이 등장했다. 재단은 직접 호스트를 구했고, 자신들이 구한 호스트 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쿼터를 만들어.

팔았다.
쿼터 하나 당의 가격에는 재단의 운영비와 인건비가 반영됐고, 추가로 그들이 원하는 수익이 더해졌다. 호스트들은 재단에 수익을 안겨주는 대가로 지원비를 받아 챙겼으며, 이 역시 쿼터의 가격에 얹어졌다. 여기에 중개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타국의 유학원에 지급할 소개비까지 더해지니 교육은 점점 훌륭한 상품이 되어갔다.

교육 시장은 파이가 크다.
부귀영화로 가는 여정의 패스포트로서 영어는 맹목적 추앙의 대상이었고, 영어 교육 필요성에 대한 맹신은 광기에 비견될 사회 분위기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열기가 살짝 사그라들긴 했었지만, 부모들은 앞다퉈 자녀를 유학 보내고자 했고, 애들도 가고 싶어 했으며, 돈은 충분했다. 캐시만이 오갔고, 당연히 현금영수증은 발행되지 않았다. 가끔 회식을 하며 동료끼리 실적을 확인하니 보스가 벌어들이는 규모가 얼추 나왔다. 어마어마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했다.
유학원들은 그 원가 구조를 알리 없는 부모들에게 점차 많은 것을 요구했다. 더 더 더. 0이 7개가 되면서부터 교육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고, 이 거위를 빼앗고자 싸움이 일어났다. 급기야 보다 많이 가진 자는 사전에 쿼터를 매집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매집 된 쿼터는 직원에게 목표치 할당으로 돌아왔고, 직원은 세일즈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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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미국에서의 1년이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멋지고 가치 있는 이벤트가 될지 신화와 감동을 마구 쑤셔 넣어서 화려하게 각색한 다음 현장감을 불어넣어야만 했다. 젠틀하지만 강렬하게, 유머러스하지만 신뢰감 있게, 과거의 경험이지만 미래인 양 썰을 풀어야만 했다. 보스가 그걸 원했으니까.

즐겼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본 것에 대해 알려줬으니까. 학생들은 본토 전역으로 랜덤하게 흩어진다. 따라서 대부분 지역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아는 것은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됐다. 동료들 모두 한때 미국에서 체류했지만, 처음 정착했던 주를 벗어나 본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동일한 해에 동부, 서부, 중부를 모두 가본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찔러보면 뭐가 됐든 쓸만한 정보가 나오니 학생들이 따랐고, 어떻게든 미국에서 지내고 싶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나는 마치 내가 갈 유학인 양 열과 성을 다했다.

뭔가에 홀린 듯 내게 할당된 쿼터를 채워 나가니 단 하나만 남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공들여 상담을 진행해오던 학생과의 계약이 거의 성사 직전에 이르렀다. 총 8번의 토요일을 반납하게 만들었던 학생이었는데, 미국을 너무너무 가고 싶어 했다. 너무 간절하니 어느 순간 나도 간절히 보내고 싶어졌던 학생이었다. 그리고 보스도 보내고 싶어 했다. 아마도 최종 교환 학생 참여가 결정되면 돈을 더 받는 물밑 접촉이 있었나 싶었다.

성적이 나쁘면 참여가 불가능하다.
교환 학생 신청자가 너무 많으니 재단에서는 학생들의 3년간 성적도 참고를 해 신청 자격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뒀다. B 이상. 우리나라 제도로 치면 80점. 근데 얘는 79.7점. 자격 요건을 만들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근데 시발 조작까지 하기는 싫었다. 지가 가고 싶으면 공부는 하기 마련이다. 지시는 무시하고 학생의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네이트 온으로 시험공부를 챙겨줬다. 그렇게 이 동생은 가뿐히 지원 자격을 갖췄다.

어쩌다 보니 의지할 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얘 땜에 초과근무가 많아졌는데, 애증인지 뭔지 감정이 생기자 계속 챙기게 됐다. 형. 가고 싶어요. 나 꼭 가고 싶어요. 가고 싶단 말만 오만 번쯤 들었을 때 학생의 아버님께 연락이 왔다. 아내와 아들을 통해서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내 자식을 맡기는 거나 마찬가지니 직접 뵈었으면 하오. 9시까지 찾아뵙겠습니다! 서울에서 5시간 거리였지만 내일 아침에 당장 찾아뵙겠노라 선 조치 후 보고를 한다.

내 차 타고 다녀오고.
성사되면 영수증 올릴 것. 불발이면 기름도 채워서 올라올 것.

독일 3사 중 하나의 세단에 수트를 입고 난생처음 올라타 악셀을 밟자 온 세상이 사물에서 선으로 변해 지나쳤다. 꼭두새벽. 오가는 이 없는 고속도로. 네 발 달린 짐승의 등에 올라탄 것 같았다. 헤드빔이 닿는 거리 너머 쩌- 앞의 아스팔트를 움켜쥐고 끌어당기듯이 자동차는 쭈아아악 뻗어나갔다. 4시간을 하염없이 감탄하자 아침 해가 부서지는 남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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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지도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암만 설명해봤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 실감을 잘 못한다. 부모나 학생이나 뉴욕 내지는 캘리포니아 연안 도시들만을 꿈꾸지 유타의 산골이나 위스콘신의 칼바람은 안중에 없다. 따라서 항상 당부를 하곤 했다. 무엇을 상상하던 현실은 아마도 다를 것이라고.

학생의 아버님은 교육 사업으로 큰돈을 만졌다.
당연히 상담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가 쏟아내는 말을 알아서 잘 걸러 캐치하셨다. 어차피 결과는 아들이 가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적응 잘할 수 있게 현지를 잘 아시는 분들이 도와주십시오.

프롤로그 넷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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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 몰랐던 부분인데 잘 알고 갑니다. 글을 잘 쓰시네요 ^^

저도 잠시 저 쪽 일하면서 아 이런게 있구나 했네요.
글은..천만에요. 민망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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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쏙 빨려들어 읽었어요.
다음이 궁금하네요.

칭찬쟁이시네요.ㅎㅎㅎ
다음은..월요일에 :)

(주말은 나가서 놀자구요.ㅎㅎ)

월요일 기억해야겠어용.

보팅하고 갑니다.
글 재밌어요!

영상 보러 가겠습니다 ! :))

몰랐던 세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에요..!
정말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해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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