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mf’ author] 무진기행, 김승옥의 세련되고 날카로운 감성의 단편들

in #book6 years ago (edited)


치기 어린 젊음.
젊음으로 지은 죄.
무관심한 척 쿨한 척하는 것이 멋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린 날.
그 시절 초상 같은 김승옥의 작품들.

술에, 유혹에 넘어가서
비도덕과 악을 행하고도 태연한 척했던
청춘을 아파하는 글들이다.
나의 청춘과도 닮아 읽는 내내 가슴이 아릿한 느낌.
그 젊은 날의 고뇌를 통감한다.


김승옥을 더 읽고 싶다. 그러나 그는 절필했다.
뇌졸중으로 언어 능력 상실시키고 그를 귀의하게 한 신의 의도가 궁금하다. 그가 계속 글을 썼다면 니체 뺨치게 신을 조롱할 것 같아서였을까. 그의 글은 시크하고 세련된 만큼 못됐다. 특히 여자에게 못됐다. 그 못됌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자의 치졸한 복수심이 느껴진다. 프로이트식 욕망이론은 들먹이지 않겠다. 그건 정말 지겹거든.

젊은 날 그의 모습에는 천재의 광기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욕망이 서려 있다. 그러나 80 이 된 그의 모습은 누그러진 듯 순한 느낌이다. 아팠다고 한다. 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의 단편들은 몹시 좋다. 계속 글을 썼다면 모파상, 체홉, 모옴에 비견할 작가가 되었을지도...

이 작품선에 실린 작품들은
작가가 무신론, 불가지론일 때 쓴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갖지 못하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절망에 슬픔을 반죽하던 시절에 알고 싶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인지 그토록 알고 싶어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헤매던 시절에 쓴 글이다.

하나님 나는 ‘하느님’이라 부르지만, 그의 종교는 ‘하나님’이라 부르므로 이 두드려 오물을 토하게 해준 글이라고 말하는 작가.
구토물치고는 너무 멋있는 거 아닌가? 샤르트르의 ‘구토’가 문득 떠오른다. 샤르트르는 내게 잊혀진 작가이지만.
80의 작가가 얄밉게 느껴진다.


김승옥

金承鈺
194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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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대표작품선
50년 전 쓴 글들이지만 세련되고 날카로운 감성이 전해진다.



60년대식



'당신에게는 정열이 없어 보인다.' 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상스럽게도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는 얘기에선 패배감조차 느꼈다.
이런 느낌들이 정열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정열을 무의식적이나마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진기행 霧津紀行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無爲 무위와 똑같은 무게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 저 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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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수첩



그때의 선애는 뭐랄까 요염하도록 순진한 창녀였다. 그러나 알아가는 동안, 그녀는 요염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시골 어느 가족의 맏딸로서 생활에 부대껴서 닳아질 대로 닳아진, 그래서 거세기 짝이 없는 여대생일 뿐이었다.

튼튼한 백치나 낳았으면......
고뇌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영화나 보고 좋아하고 야구 구경이나 하면 시간을 보내고도 후회하지 않는 아주 속물로......


미안하다? 얼마나 무책임한 언어인가?

알 듯하다. 노인들에겐 놀랍도록 웃음도 없고 눈물도 없는 까닭을. 인간은 수많은 병기로서 무장하고 있다. 사랑, 미움, 즐거움, 서러움, 자만, 회오... 혹은 섬세한 연민, 섬세한 질투... 그런데 살아가노라면 단지 살아가노라면 이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마비되어 가나 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묘한 장점이 훼손되어 있기도 하리라. 아아, 싫다. 마비시켜버리더라도 뚜렷한 의식 가운데서 그러고 싶다. 그러기 전에 그러한 병기들을 잃어버리고 싶지가 않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너의 이른바 고뇌라는 것에서는 젖비린내가 난다'고 하며 웃어버릴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만은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더 절실하게 나의 번민을 앓아주고 있는 것이니 그런 분들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분들이 나더러 저 범속한 사람들 틈에 끼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아우에게 버스칸에서 영감처럼 앉아있을 수 있는 대학생이 되어주기를 그리고 선애가 차라리 튼튼한 백치를 낳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윤수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설픈 미덕이었다. 아무런 보상 없는 세상에서 윤수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아아, 미친 놈이었다. 신이 있어 윤수를 죽인 자를 가리키라고 했다면 나는 수영이를 지적하고 싶을 정도였다. 깨끗이 속아 넘어간 윤수. 바보.

나의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는 나도 죄의 기준이란 것을 좀 올려 볼 생각이지만...



숙이의 까마귀


아주 짧은 단편으로 그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움마이야기


소 이야기로 슬프다. 소를 빌어 은유한 인간사로 읽어도 슬프다.



서울의 달빛 0章



세면이 일과의 하나이듯 성교 역시 일과의 하나였다. 매번 다른 여자라는 사실은 매일 낯선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과 흡사했다. 빨리 통과해버리고 싶은 여자가 있었고 며칠이고 머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여행이었다. 가는 곳마다 고향과 비교해 보듯 여자마다 아내와 비교해 보곤 했다. 그러나 모두가 고향과 닮았으나 아무 데도 고향은 아니듯 모두가 아내를 닮았으나 아내는 아니었다. 실제로 며칠이고 머물고 싶어 붙잡은 여자도 마침내는 비용만 축낼 뿐 어느 순간에선가 역시 타향이라는 깨달음만 안겨 주는 것이었다. 나의 타향을 자기의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있듯 나에겐 타인인 그 여자들을 고향으로 갖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배치가 다르고 가꿈이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결국 모든 곳이 집과 길과 숲과 냇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듯 그 마을의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 뻔해서 들어가기도 싫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시작에 느꼈던 기대와 흥분도 이내 잃어버리고 지저분하나마 익숙한 고향 거리에 대한 향수만 짙어 갈 뿐이었다.


理想은 없고 경제적인 여유만 가진 계층이 우리 사회에 생겨나고 있다. 그 시시한 계층에 낄 수 있기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순간순간의 감정 욕구에만 충실한 시시한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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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서울의 달’은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章’를 각색한 드라마다.

김승옥이 그린 1960년대의 대한민국에 비해 무엇이 나아졌나? 발전이라 하지만 나라 빚은 더 늘었고 국토는 피폐되었다. 자살률은 높아졌고 출산율은 낮아졌다.

무엇이 나아졌는지......







written, photographed by @mardamf MadamFlaurt
#author #genius #think


[madamf’s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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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무진기행.....
일빠로 풀봇하고 읽어보기.^^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김승옥이 교회로 가버렸구나 그럴 수 있지 , 편한곳이니까요.

일빠 축하해요.^^
그의 경우, 신이 부른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 찾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요.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지만
신은 누굴 부르고, 대답하고, 보장하고 그런짓 잘 안하실걸? 숨어있지 .
...침묵하시는 god. 숨어계신 god. 보이지아니하시는 god ㅋㅋ

그런 godㅎㅎ
침묵하는 걸 좋아하는 god
숨바꼭질을 즐기는 god^^

(╹◡╹)무진기행은 언제 한번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담님은 정말 박학다식 하시네요👍

박학다식은 정말 아니에요ㅎ
얕고 넓게 대충 아는 거죠 ㅎ
에궁 실망하셨겠다 ㅎㅎ

저도 한때는 이상을 꿈꾸었던 이카루스가 있었지요.
지금은 날개를 잃고 차가운 진흙바닥을 뒹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저는 장자가 초나라 사신이 왔을때
비유한 제사용 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도 제앞의 제사용 소가 도살되는걸 보고 바로 탈출하긴 했지만 말이죠.ㅎㅎ

와우! 고치님, 댓글이 철학적이군요.
밀랍이 아닌 아이언 날개를 장착하고 다시 날아오르시길!^^
마지막 문장은 메타포인가요? 실화인가요?

실화 입니다. ㅋㅋㅋㅋㅋㅋ

헐~ 어릴 땐 아니죠?
그럼 트라우마가 있을텐데?

아뇨아뇨 20대 넘어서에요ㅋㅋㅋㅋ 그냥 그거보고 좀 그래서 ㅋㅋㅋㅋㅋ

한국가면 꼭 챙겨야 할 책입니다 ㅎㅎ

곧 오시니 곧 만나시겠네요.
챙길 것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을 것 같아요.^^

무진기행을 열 번만 필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열 번 읽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안 했다고 해야 옳겠지요.
무슨 배짱이었는지...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필사가 꼭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느끼면 되죠.
한번 더 읽고 싶긴 한 소설이에요.
jjy님,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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