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전투

in #bookreview5 years ago (edited)

Book Reviewer @ilovemylife입니다.

오늘은 옹진반도 전투에 대해 소개합니다. 6.25전쟁의 주요 전투 소개 첫 번째 포스팅입니다.

옹진반도는 38도선에서 가장 서측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은 인천까지 해로로 약 90km거리에 위치해 있고, 38도선과 해주만으로 인해 내륙으로는 육로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마치 38도선으로 인해 고립된 섬과도 같은 곳입니다.

옹진반도에 투입된 북한군은 제3경비여단(여단장 최현)과 제6사단 제1연대(연대장 한일래) 등 15,000여명 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주포 5문, 전차 3대, 122㎜곡사포 12문, 76㎜곡사포 36문, 등 총 196문의 각종 포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국군은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와 1개 포병대대 등 2,719명 이었습니다. 한국군은 105㎜곡사포 15문, 81㎜박격포 12문 등 93문의 화포로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전투력은 병력면에서 5:1, 화력면에서 2:1 이상 열세였습니다.
20190112_151742-1.jpg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출처: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004)

북한군은 옹진반도에 주둔하던 한국군이 지형상 보급과 연락유지 등에서 어려움이 있고, 소수의 병력만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대병력을 집중해서 일거에 섬멸, 옹진반도를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한국군은 54㎞에 달하는 넓은 정면을 2개 대대로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작전계획은 북한군이 침공하면 2개 대대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격퇴 불가능할 때는 부포를 확보해 증원 병력을 투입, 공세 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마저도 불가능할 때는 해상 철수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철수계획은 구체화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05:00에 북한군은 한국군 방어진지에 각종포를 동원해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군 17연대 좌측대대인 1대대 지역에는 북한군 1개 대대가, 우측대대인 3대대 지역에는 북한군 2개 대대가 각각 공격을 했습니다.
20190110_144726.jpg옹진반도 전투상황도 (출처:6.25사변 육군전사 2권, 육군전사감실, 1953)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하고 1시간이 경과한 시점에, 한국군 1대대 지역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동리를 포기하고 후퇴했습니다. 이에 예비인 2대대가 피탈된 1대대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반격을 했습니다. 2대대의 역습은 적 병력 20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거두었지만,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한 1대대로 인해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3대대 지역의 상황은 1대대에 비해 더 나빴습니다. 북한군은 전차와 기마병을 선두로 공격을 했습니다. 이어 추가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3대대는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약 2시간 만에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이후에도 연대는 철수병력을 수습해 간헐적인 역습을 실시하지만, 적의 강력한 압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연대장은 6월 26일 12:00에 전병력의 철수를 결심하고 부포항에서 해군 LST를 이용 인천으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의 전과는 국방부 공간사에서 적 사살 581명, 적 자주포와 장갑차 파괴 10대, 아군 전사 123명, 부상 371명, 실종 64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과만 보면 아군이 성공적인 작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전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한국군은 사전 철수계획을 구체화하지 않아 철수를 시작하고 약 3일이 지난 이후에야 잔여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었고, 연대와 포병대대가 보유하고 있던 화기와 중요 장비는 대부분 유기하고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북한군에게 해주진공설과 옹진포격설과 같은 북침설에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해주진공설은 당시 연합신문사 기자가 17연대장을 면담하고 서울로 돌아와 국방부 보도과장과 대화과정에서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지는 “백인엽 대령이 서울 가거든 이 말을 전해주시오. 백인엽이는 부대를 지휘해 해주로 진격하겠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토대로 국방부는 언론보도를 통해 “국군 해주로 진격중”이라고 알렸습니다. 이에 대해 백인엽 본인은 부인했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추가적으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다음은 옹진포격설입니다. 한국군이 6월 23일부터 포격을 실시해 이에 대한 반격의 일환으로 6월 25일 북한군이 전투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측은 23~25일 미명까지 700여발의 포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17연대의 탄약 보유량과 탄약 사용 승인 절차 등을 고려해 볼 때, 17연대가 독단으로 포사격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음이 객관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옹진반도 전투는 열세한 병력으로 북한군의 대병력을 맞아 약 30시간 이상 버틴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전면적인 침공에 대비한 철수계획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실제 철수 작전시 많은 혼란을 유발했습니다.

이 전투는 정보, 기동면에서 문제점을 노출했습니다. 전쟁 개시 수주 전부터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음을 감지했음에도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연대장은 적의 주공을 좌측으로 판단하고 예비를 이곳에 투입함으로써, 실제 우측에 집중된 적의 주공에 의해 연대 방어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상 Book Reviewer @ilovemylife였습니다.

참고문헌
6.25사변 육군전사 1, 2권(육군전사감실, 1953)
6.25전쟁사 2권(군사편찬연구소, 2005)
조국해방전쟁사 1권(사회과학출판사, 1973)
통계로 본 6.25전쟁(군사편찬연구소, 2014)
조국해방전쟁사 1권(교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한국전쟁(박태균, 2007)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군사편찬연구소, 2003)
학도유격부대전사(옹진학도유격부대전우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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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사살 581명, 적 자주포와 장갑차 파괴 10대, 아군 전사 123명, 부상 371명, 실종 64명으로 기록

병력과 화력면에서 열세임에도 전과가 좋았군요! 결국 철수는 했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거님.

이당시에는 모든 국민 청년 국군장병들이 애국자 이심니다,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는것같읍니다,

초반 급습으로 인해 계속 패주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전과를 올렸었군요.
좀더 대비만 잘 되어 있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초기전투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죠.

6.25 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세세한 이야기도 존재하고 있었군요.

그나저나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르...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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