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봉일천 전투

in #bookreview5 years ago (edited)

Book Reviewer @ilovemylife입니다.

오늘은 개성-문산-봉일천 전투를 소개합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한반도를 침공할 때 주된 침입로였으며, 임진왜란시에는 왜적의 주요 공격 축선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6.25전쟁시에도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전략, 전술적으로 중요시 되고 있는 군사상의 요충지가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향후에도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관심 받게 될 것입니다.

개성, 문산 방면에 투입된 북한군은 제1사단(사단장 최광),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포병연대 등 약 21,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122㎜곡사포 24문을 비롯해 모두 444문의 화포로 무장되었으며, 자주포 32대, 전차 40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한국군은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과 포병1개대대 등 10,161명이 방어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105㎜곡사포 15문 등 69문의 화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의 전투력은 병력면에서 약 2:1, 화력면에서는 6:1로 열세였습니다.

북한군 1사단은 구화리로, 6사단은 고랑포 적성 방면을 주공으로 일거에 개성 연백지구의 아군을 공격 분산시키고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아군의 한강이남 후퇴를 차단, 일대격멸작전을 감행하고자 계획했습니다.

한국군 1사단은 제11연대를 사단예비대로 사단사령부와 같이 수색에 배치하고 제12연대를 개성 연안 백천에, 제13연대를 문산 고랑포 일대에 배치하여 38선 일대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보유병력에 비해 담당 책임지역이 넓었습니다. 사단은 38도선의 경계진지에는 최소의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제2방어선은 임진강 남안을 좌우로 연하는 선 일대로 선정하고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2방어선을 지탱할 수 없으면, 봉일천을 좌우로 연하는 선에 제3방어진지를 구축해 적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지형의 불리한 제반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파주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광정면인 개성 연백 부근에는 주요지점에 소수의 병력만을 배치하고 주력은 후방에서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20190112_152827-1.jpg피난민 행렬(출처: 박도 엮음,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004)

6월 25일 기갑부대를 동반한 적의 전면적인 기습으로 한국군 1사단은 38선 일대에 배치되었던 대부분의 병력이 분산 낙오되었으며, 25일 자정까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습니다.
20190112_171827-1.jpg6.25전투상황(출처:6.25사변 육군전사)

6월 26일 북한군 소수 병력이 임진교로 진출했고, 문산돌출부에 주력을 투입했습니다. 한국군 1사단은 6월 26일 12:00경에 예비인 11연대를 투입시켜 역습을 감행, 오후에는 잠깐 주진지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간에 북한군 1사단의 주력이 문산돌출부를 다시 공격하고 전차부대가 경의도로와 13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파병산 지역까지 진출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에 사단은 11, 12연대의 고립을 방지하고 전선을 정리하기 위해 최후 방어선으로 선정한 봉일천 일대로 철수해 진지를 점령합니다.
20190112_171957-1.jpg6.26일 전투상황(출처: 6.25사변 육군전사)

6월 27일 봉일천 일대의 방어는 13연대와 증원된 15연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봉일천에서 한국군 1사단은 적의 예봉을 꺾고 반격을 위한 거점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하지만 적의 기갑부대와 막강한 화력으로 인해 돌파된 지역을 회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20190112_172104-1.jpg6.27 상황(출처: 6.25사변 육군전사)

6월 28일 북한군의 기마부대가 봉일천 동측에 출현하는 등 아군의 후방에까지 적이 진출해 사단의 전병력의 차단과 포위를 우려, 철수를 합니다. 사단은 행주와 이산포 2개 지점의 도하지역을 통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합니다. 많은 병력과 장비가 제대로 도하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해 차후 작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0190112_172222-1.jpg6.28 상황(출처: 6.25사변 육군전사)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인 6월 24일 사단의 보직병력 1/3이 휴가를 떠났고 나머지 병력의 1/3도 외출, 외박이 실시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80㎞가 넘는 연대의 방어정면에 약 800명만 배치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군 전방사단 대부분의 문제였지만, 사단은 육본의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기지창으로 후송되었고, 보병연대의 박격포는 부평의 병기대대로 입고되었습니다. 이런 조치들은 육군본부의 석연치 않은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사실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지시들이 내려왔는지 밝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 Book Reviewer @ilovemylife였습니다.

참고문헌
6.25사변 육군전사 2권(육군전사감실, 1953)
6.25전쟁사 2권(군사편찬연구소, 2005)
지울 수 없는 이미지(박도엮음, 눈빛출판, 2004)
한국전쟁(박태균,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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