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알려줘]잊을 수 없는 그 맛

in #bus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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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맛. 어머니 손맛?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을 때부터 길들여진 입맛을 잊을 수는 없다. 큼직하게 한 스푼씩 들어가는 미원의 장난인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우리 어머니의 손맛은 특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라는 이미지와 겹쳐 그려지는 거라서 세뇌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진부한 설정 말고 무심코 먹었다가 눈이 둥그레지도록 놀라는 맛. 재현 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는 맛. '맛있다'라는 말 가지고는 백 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는 맛. 그런 맛이 어디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한 번 있다.

@yourhoney님의 이벤트를 보고 잊을 수 없는 그 맛이 생각났다.
특별할 것 없는 송어회와 은어회다. 은어회는 생소할 수도 있다. 나에게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어 놓고 다니며 배고플 때마다 우걱우걱 씹어 먹던 20대 초반, 펄펄 날던 청춘 몇 명이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다. 화엄사부터 걸어 올라가 지리산 능선을 타고 천왕봉까지 가는 코스였다. 보통 3박 4일 코스지만 우리는 2박 3일로 일정을 잡았다.
때론 장엄하고 때론 괴이한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새도 없이 줄창 걸었다. 먹을 것 중심으로 배낭을 꾸리다 보니 천왕봉에 가까울수록 무게가 가벼워져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말이 걷는 것이지 가파른 등산로를 만나면 네발로 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여 두 번째 밤을 보냈다. (밤이라고 다 므흣한 건 아니다. 우리는 남자 셋. 둘은 두 학번 높은 선배들이고 난 막내였다. 물 뜨러 가거나 설거지 하러 가는 괴로운 길은 내차지였다.) 셋째 날 천왕봉을 오른 후 장터목에 돌아와서 어느 쪽으로 내려갈지 고민했다. 천왕봉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백무동 계곡 방향이었던 것 같다.

더이상 먹을 것도 없었고 거지가 들어앉은 듯 배가 고팠지만 가벼워진 배낭 덕분에 한두 시간 만에 계곡 아래까지 내려왔다. 날았다는 게 맞을 정도로 뛰어 내려왔다. 다리가 풀려 있어 걷는 것 보다 뛰는 것이 편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 계곡이 있었다. 이렇게 크고 시원한 계곡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내려왔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장면을 보고 우리는 모두 웬 떡이냐를 외쳤다.

웃옷을 벗고 계곡물에 뛰어들었으니 꽤 더운 날씨였나 보다. 한참을, 물속에서 땀날 정도로 한참을 놀았다. 그리고 이 단순 무식한 젊은이들은 허기지고 목이 말라서, 뭣 좀 먹지 않으면 돌연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물을 나왔다. 샤워는 못 하고 커다란 바위 뒤에서 옷만 후딱 갈아입었다. 두 개만 걸쳤다.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 나머지는 없었다.
시원스러운 차림으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이 우리 일행처럼 팔딱이는 송어와 은어였다. 특히 큼직한 송어의 그 아름다운 자태란...

  • 이거 얼마에요?

회 뜨면 한 마리 만원이란다.
우리는 평상에 앉아 각자 남아있는 비상금을 털었다.
나는 차비 빼고 만 몇천 원.
선배님들은 빵 원. 심지어 차비도 없어...

  • 집에 어떻게 갈라구요?
  • 어떻게 되겠지.(이구동성)

만약 A형이었다면 즉시 내뺐을 테지만 난 B형이므로 그런가 보다 했다. 알아서들 하시겠지.

주황주황하는 영롱한 주황색 속살을 드러낸 송어 한 마리 상위에 올려졌다. 우리 셋은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왜소한 스미골도 물고기 한 마리쯤은 쉽게 먹어 치우는데 장정 셋에게 송어 한 마리는 너무 아쉬웠다. 모두 입맛만 쩍쩍 다시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한 마리 더 먹기로 했다. 내 차비까지 털렸다.
메뉴판을 보니 은어는 5마리 만원이었다. 송어 옆 수조에서 헤엄치던 은빛 물고기였다. 우리는 은어를 주문했고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매운탕도 없이 회만 두 접시를 비우고 배고픈 채로 식당을 나왔다.

맛은, 사람과 공간이 숙성시키고 시간으로 조리하는 요리다. 젊고 지친 청춘이었던 나는 인상 깊었던 지리산 종주를 송어회와 은어회의 맛으로 더욱 각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름지게 고소한 송어회였고 은어회의 끝 맛은 담백했다.
개 털린 날, 함께했던 선배님들아. 잘들 있나? 우리 그때 어떻게 집에 갔지?

에잇, 내친김에 오래 묵어서 군내 나는 지리산 여행이나 포스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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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알려줘/5월 3주차 보팅지원]

아 은어회를 아시는구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회에소주...ㅠㅠㅠㅠㅠㅠㅠㅠ
이 포스팅 돌아다니다가 배고파서 광광우럭따...

한 잔 하신 듯....ㅎㅎ

헐..
집에는 어케 왔대요?
갑자기 글을 읽다가 옛날에 차비 없이 걸었던
생각이 납니다 ㅠㅠ

한 번쯤 다 있겠죠.. 차비 없어서 걸어가기..
저는 여러번...ㅋㅋ

물놀이하고 배고픈 상태에서 먹었어서, 회 맛이 더 기억에 많이 남으시나보네요.
지리산에서 집 가는건 어찌했을지가 궁금하네요 ㅎ

아무래도 배 고프고 기진맥진 해서 더 맛있었을지도... 집에 어캐 갔는지는 모르겠어요..ㅠㅠ

아니 마무리를 지어야죠. ㅋㅋ
집에 어떻게 도착 했습니까?

오랜만에 듣는 지리산 지명들이네요.
지리산 종주 참 힘들었지만 기억에도 많이 남네요.

한 번 갔다 오면 또 생각나죠.. 그래서 전 두 번했어요..집에 어캐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젊었을때 추억과 기억은 정말 소중 합니다
저도 그냥 젊음에대한 객기로 구두신고 설악산 정상으로
오른적 있어 개 고생 한적 있습니다 ㅎㅎㅎ

구두로 설악산을...ㅋㅋ
산이 많이 아팠겠네요. 그런 시절이 기억에 많이 남죠..ㅎㅎ

앞날의 걱정은 하지 않고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 행동에 옮기는 청춘의 용기가 회맛을 만들어냈군요. 맛은, 사람과 공간이 숙성시키고 시간으로 조리하는 요리다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sadmt님 식당의 음식들 맛이 궁금해지네요. ㅎㅎㅎ

집에 어떻게 가셨을지 다음 포스팅도 기대됩니다.

우리 가게 음식맛이야 따봉이죠..ㅋ
젊었을 적이나 그렇게 해보는 거겠죠.. 아무튼 그 회맛은 지워지지 않아요..
집에 간 방법은... 저도 몰라요.. ㅎㅎ

유피님 글은 묘사하는 장면이 상상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ㅎㅎㅎ
지리산 여행 이야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ㅎㅎ

할까 말까 했는데 씬님 땜시 아무래도 해야겠네요.. 기억을 또 더듬어야...ㅎㅎ

캬 지리산.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 많은 곳
백무동...

근데 내용이 소설같아요.

유피님의 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네요.

언제 같이 지리산 밋업을 할까요?
회도 먹고
걷거나 히치하이킹도 하면서 ㅎ

지리산 계곡 같은데서 발 담그고..막걸리 한 잔..크
그런데서 볼 기회가 된다면 참 반가울 텐데요..ㅎㅎ

송어는 먹어 본 기억이 있는데 은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네요.
아무 못봤거나 봤어도 이름을 몰랐거나 둘중 하나같습니다.
지리산 종주기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이곳 날씨는 너무좋네요..다행입니다^^

오늘 내일 날 좋다고 하니 하시는 일 잘 되실겁니다..
은어회는 전라도 쪽에서 먹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가물가물 하네요..ㅎㅎ

아하.... 뭔가 저도 함께 먹은 기분이네요 ㅎㅎㅎㅎ
지리산 종주라... 뭔가 로맨틱한데... 선배와 함께... 쿨럭...
토닥토닥...?;

예 토닥토닥 같은 거 당해도 쌉니다.. 한 텐트 안에서.. 목소리 굵은 선배들과..ㅋㅋㅋ
그래도 기억은 많이 남네요.. 여친이라면 완전 각인 됐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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