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Antigone | 소포클레스 Sophocles

in #dclick5 years ago

희랍 비극을 완성한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걸작들!

오이디푸스 왕』 표지

소포클레스의 대표작들을 모은 희곡 작품집『오이디푸스 왕』.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소포클레스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현재까지 전문이 남아 있는 작품들 가운데 희랍 비극의 완벽한 모범이라 불리는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하여 '안티고네',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이 담겨 있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의 복잡하고 모순된 경험들을 심오하게 그려내고, 기교와 형식 등 다방면에서 희랍 비극을 완성하여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이 책에는 뛰어난 구성과 치밀한 묘사, 심오한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네 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서양 고전학자 강대진이 희랍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표현의 본뜻과 속뜻을 원문에 가깝게 풀어내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담고 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를 두고 외삼촌 크레온과 대립하면서 생기는 비극을 그렸다. '아이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또 다른 영웅인 아이아스의 이야기를, '트라키스 여인들'은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다.

소포클레스(Sophocles)

소포클레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기원전 496년에 아테나이 부근의 콜로노스에서 태어났다. 절망과 불운에 시달렸던 그의 희곡 속 인물들과 달리 소포클레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수려한 용모에 부와 건강을 고루 갖춘 것은 물론 동료 아테나이인들로부터 높은 존경까지 받았다. 그는 기원전 468년에 비극 경연 대회에서 아이스퀼로스를 물리치고 첫 우승을 거두었으며, 기존 두 명의 배우에 세 번째 배우를 추가하여 극적 갈등의 범위를 넓히고 코로스와 무대 장치를 개선하는 등 전통적인 비극의 형식을 서서히 바꿨다. 기원전 440년 후반쯤에 「아이아스」, 「트라키스 여인들」, 「안티고네」를, 기원전 425년경에 「오이디푸스 왕」을 상연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포클레스는 평생 동안 120편이 넘는 희곡을 썼는데, 전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엘렉트라」, 「필록테테스」까지 총 일곱 편이다. 극작가로는 물론 정치인으로도 오래 활동했으며, 기원전 406년에 90세의 나이로 아테나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미 죽은 자를

또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나의 첫 비극 읽기의 열정은 『오이디푸스 왕』로 시작해 그의 딸 이야기 『안티고네』로 옮겨가며 더 크게 발화되었다.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취한 오이디푸스의 말로는 참혹했다. 그래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인간의 의지를 보이며, 자식들의 미래를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아비의 모습에 감동이라도 한 것인지 딸 안티고네는 테바이에서 추방당한 눈먼 오이디푸스의 떠돌이 생활을 보필한다. 오이디푸스가 죽은 뒤 안티고네는 다시 테바이로 돌아온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다. 이번에는 두 오빠가 권력싸움으로 한날한시에 서로를 찔러 죽은 것이다. 이에 외삼촌 크레온이 권력을 잡으며 테바이를 지키려다 전사한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를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적국의 사위가 되어 고향을 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무덤에 묻지도 말며, 애곡하지도 말라고 포고를 내린다. 물론 안티고네는 이를 어김으로써 스스로의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어떻게 보면 안티고네의 이러한 행보는 예상된 결과였다. 영웅에서 파렴치한으로 전락한 오이디푸스의 방랑길에 함께하는 결단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세상의 그 어떤 비난과 놀림에 도 굴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극 중에서는 신의 뜻)를 다한 것이다. 더욱 눈여겨볼 점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구성 능력이다. 남존여비라는 문화를 가진 시대 상황에서 안티고네라는 여성을 주요 캐릭터로 선정했다. 극 시작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 크레온의 지시를 거부하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자고 제안한다. 이에 여동생 이스메네는 우리가 여자로 태어났고, 남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주저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내 가족과 나 사이를 가로막을 권한이 그(크레온)에게 없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부분은 안티고네를 통해 소포클레스가 전하려고 했던 첫 번째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온으로 대변되는 국가의 명령이 안티고네의 불문법을 넘지 못한다는 것과 여성이 남성과 같이 동등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이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이후 오빠의 장례를 치른 죄로 크레온과 원로들 앞에 선 안티고네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함을 조목조목 소리 낸다. 신들의 법(죽은 자가 하데스에게 가는 것)을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넘어설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크레온은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그녀의 고집 센 성격을 저주한다. 그리고는 무덤을 만들어 산 채로 안티고네를 가둔다. 죽은 자(안티고네의 오빠)를 이승에 남기고, 산 자(안티고네)를 저승으로 보내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다행히도 크레온은 이 오류를 고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아들 하이몬(안티고네의 약혼자)의 조언이었고, 또 한 번은 오이디푸스의 말로를 예언했던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었다. 끝까지 이 두 번의 기회와 대치하던 크레온은 원로들의 만류로 결국 신의 뜻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안티고네를 살리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진척될 대로 진척되어 극의 절정에 다다른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이 맹수들에게 훼손되고, 안티고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여기서 크레온은 새로운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극한다. 바로 안티고네의 약혼자였던 아들 하이몬이 그녀 옆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자신의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 아들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를 뒤따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의 잃은 충격에 아내까지 목숨을 끊으며 크레온은 충격에 빠진다. 신의 뜻을 거스른 한 인간의 오류가 삶을 파멸로 이끈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무(無)나 다름없는 자라고 말하며, 신들에게 죽음을 달라고 외치나 이마저도 저지 당한다. 죽은 자를 이승에 남기고, 산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오류를 범한 크레온은 그 자신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 홀로 이승에 남게 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안티고네로 시작된 비극이 크레온으로 옮겨붙으며 마무리되는 이야기에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두 번째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보편적인 주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이야기를 읽으며, 두 가지의 교훈이 마음에 담겼다. 첫째는 안티고네의 인간적 도리다. 극에서는 신의 뜻(죽은 자를 장례 치러 하데스에게 보내는 것)이라 표현되는 부분을 나는 인간적 도리라고 보았다. 쉽게 말하면 도덕, 윤리, 미덕과 같은 것들이다. 안티고네는 금지된 오빠의 장례를 치르며 목숨을 잃게 되지만, 황금과 같은 명예를 얻는다. 성 안팎에서 친 오라비의 시신이 망가지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 것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중한 가치를 던진다. 시답지 않은 이유들로 마땅히 지켜져야 할 좋은 가치들이 매장되어가는 시대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정의와 올바름을 외치는 자들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을 휘둘러댄다. 이 얼마나 신의 뜻(인간적 도리)을 거역하는 일인가. 어떤 순간에서라도 안티고네처럼 황금과 같은 명예를 얻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진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다.

크레온의 상황은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신들의 일(인간적 도리)을 불경스럽게 대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오만하면 큰일을 치르게 된다는 오래된 격언이 적중했다. 크레온 입장에서는 조국을 배반하고 공격해온 조카가 괘씸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카가 이내 죽음을 맞이했고, 쌓였던 분노를 장례 금지라는 잘못된 오류로 표출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도 죽은 자를 또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크레온을 나무란다. 그리고 버티고 버티다가 무릎을 꿇는다. 나는 이 부분에 자꾸 눈길이 갔다. 크레온에게 자신의 오류를 고칠 기회는 늘 있었다. 자기의 아집과 자만을 내려놓으면 될 일이었다. 결국 늦게나마 자신의 방법을 돌리고 싶었으나 버스가 지나가버린 뒤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 곁에는 인간적 도리를 다하지 못한 오류를 고칠 기회가 늘 존재한다. 때만 놓치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더 의미 있고 가치있게 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안티고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유한하다는 의미는 열 개의 장독에 물을 동시에 부을 수 없음 의미한다. 하나의 장독에 물을 붓는 순간 아홉 개의 장독은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직급과 더 큰 명예를 얻는 일은 중요하다만 그것에 미치는 일은 안쓰러운 인생이다. 우리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스스로가 위대하다고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 이런 말이 있다. 성자 천지도야(誠者 天之道也), 성지자 인지도야(誠之者 人之道也). 우리가 선하고, 의롭고, 예를 다하며 사는 것은 분명 하늘의 뜻인지라 온전하게 달성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 그러므로 권력도 없고 업신여김을 받던 여자로 태어나 사람 된 도리를 다한 안티고네를. 자신의 삶을 교정할 기회를 놓쳐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이 된 크레온을 기억하자. 우리 인생의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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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한편을 오늘 짧은 시간에 다 읽었네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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