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43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팅은 한국에서의 단독선거를 통해 미군을 철수하고 했던 과정이 전행되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미국무장관 마샬의 기본적인 구상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틀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이면에는 미국이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서 가급적 빨리 발을 빼려고 했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1월 7일 미국무장관 마샬이 트루먼 대통령의 각료들에게 미국이 한국으로 부터 철수하는 것은 지역의 부대가 소련의 팽장을 저지할 수 없으며 한반도가 “결정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38번째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9월에 한국에 파견된 바 있는 알버트 웨드마이어는 3일이후 서울의 하지장군과 도쿄의 맥아더 장군에게 철군은 유엔의 결정과 상관없이 1948년 가을 한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안으로 철군이 검토되고 있다고 알렸다. 이 제안을 평가하기 위해, 웨드마이어는 하지 장군에게 동시철군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할 경우, 이런 방안을 취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러시아의 문서가 확인한 것에 따르면, 하지는 당시 소련의 의도에 대해 매우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육군의 작전기획 책임자인 웨드마이어에게, 소련은 한반도에서 유엔과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며 재통일도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남한에서 별도 단독 정부의 수립을 감독하고, 대규모 경비대를 창설하고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지원에 대한 하지의 평가는 현실적이었던 반면,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감독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그는 만일 지난 9월에 만들어진 5개년 부흥계획이 시행되고 미국 대사관의 잘 준비된 직원들에 이해 감독된다면, 북한주민의 민족감정이 고조하여 소련에게 두지역의 합병을 허락하라고 요구하는 충분한 압력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서울에 있던 하지의 개인 고문관은 미국무부에, 이승만은 자유로운 선거가 되면 패배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들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서울의 좀 더 온건한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인들에게 간청하여 이승만이 힘으로 유권자들을 협박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미국의 군정정부는 자신들이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고 수감된것이 극좌파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매우 좋은 시기라고 주장하면서 워싱턴에 지체없이 단독 선거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유엔에서의 상황을 매우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1월 4일 유엔의 정치 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이후 소련과 미국군의 동시철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승인했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이 결의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통과시켰다. 유엔의 한국에 관한 임시 위원회(UNTCOK)의 구성은 미국을 기쁘게 했으며, 9명중 6명의 멤버들은 미국과 가까운,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국민당 중국, 프랑스, 엘살바도르와 필리핀이었다. 마샬은 이런 배치를 반겼으며 하지 장군에게 선거를 준비하고 UNTCOK와 접촉하여 날자를 정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유엔 회원국들은 남한에서 폭력과 정치적 불안의 한가운데에서 개최되는 선거에 합법성을 주는 것이 대해 걱정했다. 오스트렐리아의 외무장관 H.V. Evatt는 마샬 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문제는 소련과 미국에 의해 공동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문제는 일본평화조약의 부분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과 미국이 이문제에 대한 합의가 샐패한다면, 국무장관은 오로지 국제적인 행동만이 이런 교착상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Evatt에게 미국은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으나, 그의 이런 약속이 오스트리의 외교관을 복잡한 한국문제에 개입하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다음의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승만이 점증하는 압력을 가하여 선거를 신속하게 치르도록 만들었던 미국의 제안에 대해 유엔에서 지속적인 저항이 있었다는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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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nderful article sir.
works that tell ancient korean history @wisdomand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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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의 선거가 과연 공명하게 진행 될 거라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싶네요.
너무나 혼란스럽고 열악한 시기였으니 말이죠.

힘이 없는 우리나라는 그저 풍전등화 같은 처지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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