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인들만 아는 전시공간 :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

in #kr-art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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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가 재개발 예정이었던 빈 건물에 1년간 전시 공간을 운영했다가
이제는 없어진 ‘일년만 미슬관’








미술인들만 아는 전시공간

아  티  스  트  런  스  페  이  스







나는 미술 작가다. 매년 겨울과 봄 사이에 “제 작업은..”으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어딘가에 지원서를 낸다. 가끔 붙어서 운 좋게 전시를 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미술 잡지와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메이져 공간에 선정되기는 당연히 어렵거니와, 공모를 여는 어느 곳이나 경쟁은 치열하다. 날 간택해주는 곳이 없으면 전시를 할 수 없다. 공간을 지원해주는 곳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고는 하지만 작가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어느 해였다. 기대했던 A공모에도 떨어지고 설마했던 B공모도 떨어졌다. 나름 안전빵이라고 생각했던 C도 떨어졌고, 공모를 냈었는지조차 까먹었던 D공모에서도 낙방을 알려왔다. 지원서가 문제였을까. 구구절절 간절하게도 써 봤고, 마치 대가처럼 쿨하게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는 모두 허사였다. 날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그간 치열하게 완성했던 작업은 기약없이 묻히는 것일까. 슬펐다.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마를 무렵 어떤 공모 글을 보게 됐다. 심사 없이 누구나 전시를 열어준다니? 바로 이거다! 앞뒤 알아보지 않고 바로 지원서를 보냈고 그 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이름처럼 일 년만 운영하고 역사 속으로 없어진, <일년만 미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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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일년동안 운영하고 사라진 일년만 미슬관





전시를 결정하고 장소를 보러 답사를 갔다. 당황했다. 사간동의 미술관 거리나 인사동같은 풍경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유동인구와 문화시설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가끔 초등학생 몇 명이 출몰하는 ‘그냥 동네’ 그 자체였다. 또 전시장은 큐레이터도 없었고 관장도 없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7명의 작가들이 합심하여 그 공간을 일구어냈고, 그들이 공동 운영하는 전시장이었다. 전시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원서에 냈던 작업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내가 여태껏 알고 있었던 ‘전시장’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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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공간에서는 결심하기 힘들었던 작업을 나는 일년만 미슬관에서 선보였다.
내 개인전 <블라인드 필름, 2016>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 Run Space)



외진 곳에서 마음껏 공간을 실험해볼 수 있는 <일년만 미슬관>에서 나는 개인전을 치렀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그러나 두려워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을 그 곳에서 발표했다. 아무런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전시는 향후 내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소수의 지인과 몇몇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방문했을 뿐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전시였다. 애초에 7인의 운영 작가들도 본인들의 전시 공간을 찾다가 “차라리 우리가 전시할 공간을 우리가 만들자!” 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7인의 작가들도 그 공간에서 1년간 정말 다양한 실험적인 전시를 열었다.


몇 해 전부터 이런 운영 방식의 공간이 서울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전시 공간을 통칭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라고 부른다. 공통적으로 일반 대중이 방문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이 공간들 중 일부는 미술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기도 하다. 또 어떤 공간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작업을 하면서 공간 운영까지 해나가기가 수월할 순 없기에 내년에도 존재하리라고 확실하게 기약할 수 없는 공간들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이 이러한 공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왜일까?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미술인들이 기존 미술계에 여러 가지 경로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매년 도전해야하는 치열한 공모, 경쟁, 극히 소수만 택해지는 상황, 또 인맥과 인맥으로 은밀하게 이뤄지는 신물나는 미술계 구조에 젊은 작가들이 반응하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자신만의 플랫폼’을 만드려는 시도는 예술의 전환기에 항상 일어났던 일이다. 혁명은 항상 변방에서 일어났다고 했던가. <일년만 미슬관>을 비롯한 많은 공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서울에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신생 공간이 도처에 숨어 활동하고 있다. 그 중 세 공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심사는 선착순으로 : 공간 황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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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현1동의 산꼭대기에 위치한 골방 전시장 ‘공간 황금향’





‘정말 이런 곳에 전시장이 있어도 되나?’ 싶은 곳에 전시장이 있다. 갈현동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산꼭대기다. 대찬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전방에는 절이 보이고, 바로 옆에 허름한 주택이 있다. 이곳이 바로 <공간 황금향>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하는 반지하의 조그만 공간에는 영상과 평면 작업이 몇 점 전시되고 있었다. 깔끔하고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날것 그대로의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아주 진한 맛이 느껴졌다. 1층에는 공간을 운영하는 오제성 작가가 거주하는 작업실 겸 다목적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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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반지하에 있는 공간 황금향의 전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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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다목적 공간에 설치된 진철규 작가의 작품



<공간 황금향>의 특징은 별도의 전시 공모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작가의 메인 작업이 아닌 미공개작, 습작, 실험작만을 전시할 수 있다. 또 이미 타 공간에서 무수한 거절을 받아왔을 창작자들을 위해 ‘선착순 검토제’로 작가를 선정하지만 미흡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운영위원과 함께 논의하는 과정도 거친다. 물론 전시 매체나 장르에도 제한이 없다.


공간의 특성상 작가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한다. 전시 때마다 열띤 좌담회도 개최한다고 하니,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공간 황금향>은 한 번 가보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공간 황금향>을 방문하려면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황금향 인스타그램





젊은 작가들의 붓질 : 합정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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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 인근의 주택지역에 자리 잡은 ‘합정지구’



합정역 인근의 주택 지역에 있는 <합정지구>는 2015년에 개관했다. 전면이 오픈된 유리창으로 되어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도 그 안에 전시된 작품을 힐끗 볼 수 있다. <합정지구>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공간이 되었다. 동네 주민도 가끔 오며가며 공간에 관심을 갖지만 애초부터 이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나 컬렉터를 타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운영자 이제 작가의 말을 빌어보면 ‘작가들 간의 교류와 소통’에 목말라 이 공간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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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지구’ 1층 전경. 박진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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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2전시장이 있다.



이 곳에 수차례 방문해 본 경험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체감하는 <합정지구>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회화적인 붓질을 구사하는 젊은 작가의 페인팅 위주로 전시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다른 매체보다 특히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방문해야 할 포인트다. 또 오프닝 음식이 맛있다는 점이다. 오프닝에 갈 때마다 그 좁은 골목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작품과 전시가 좋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음식이 맛있다는 점도 한 몫 할 것이라는 뇌피셜을 근거 없이 던져본다. 합정지구 웹사이트





주말에만 열어요 : 위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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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역 인근 대로변에 위치한 ‘위켄드’



북적이는 영등포역, 고급스러운 타임스퀘어, 사창가가 뒤섞여 기이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 영등포의 대로변에 <위켄드>가 있다. 말 그대로 주말에만 열어서 <위켄드>이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위켄드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2/W>에서 ‘회화 프로젝트 : 로비 머디 카펫’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추상화를 모아놓은 전시이기도 했지만, 거친 공간의 특성상 천장의 어떤 틈새까지도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미술관에서는 쉽사리 느낄 수 없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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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프로젝트 : 로비 머디 카펫>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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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풍경까지 예술을 닮아 있다.



<위켄드>는 2017년에 제니조 작가와 최정윤 큐레이터가 공동설립한 공간으로 국내외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2018년부터 위켄드는 하나의 고정된 디렉터쉽이 아닌 다양한 참여작가와 기획자가 공동 운영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동시대 미술의 은밀한 체험을 원한다면, 실험적인 젊은 작가의 작품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을 추천하고 싶다. 위켄드 웹사이트




타이틀 디자인 @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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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서울에 올라가면 가봐야 할 곳 리스트에 추가해봅니다... 메모메모

저는 순수미술쪽과는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전시를 하기 위해 수 많은 작가들이 이렇게 목말라 하고 있었는지
몰랐네요~
다행히 전시공간이 어떤식으로든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모든 예술과 창작하시는 분들께도
더 나은 미래가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술의 어느 분야든 다 비슷한 상황인것 같습니다. 지원금에 목숨걸고 공간 찾아 헤메이는... ㅎㅎ 여기 스팀잇이 좀 흥해지면 좋은 대안이 될 텐데 말이죠. 한번 기대 걸어봅니다.

미투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화이팅 입니다~ㅎㅎ(^0^)/

잠시 점포임대가 붙은 비어있는 상가를 전시장으로 빌려 쓰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물론 제가 아니라 제 동생이요^^
예전에 비해 전시도 많아지고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거창하고 멀게만 느껴져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이런 것들이 더 더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저 역시 이번 오빠 전시회를 다녀와서 오빠 작품은 크기도 하고 보관도 해야 하니 변두리 창고를 빌려서 전시겸 차 집을 만드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봤답니다. 작품과 전시가 사치가 아니 일상이 되길 바래요.
글 감사합니다~

재개발 예정지역이라던지 말씀하시는 임대공간을 잠시 빌려서 전시하는 작가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 같아요. 갤러리도 한 곳에 오래 존재하는 성격에서 옮겨다니는 성격으로 점점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요.

전시 공간이 일상적으로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한국 가면 한두군데는 방문해보고 싶어요 ㅎ

예체능 은 아무나 할수있는것이 아니고 타고나야 하는것인데
능력만큼 펼칠수 있는 장소가 없는것 같아요.
몰랐던 작은 전시장들 아늑하고 나만의 소중한 공간 같아요
일년동안 지내셨던 미슬관 자유로운 느낌과 창작의 탄생이
있었을것 같은 애뜻한 공간으로 느껴지네요

기성과 질서에 대한 반란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이런 전시장들도 운영이 순탄하지만은 않겠네요..

저는 @thelump님이 계속 '일년만 미슬관'이라고 오타를 치는 줄 알았어요.ㅋㅋ
다시 올라가서 보니 원래 간판도 '일년만 미슬관'이라고 되어 있네요.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은 공간들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공간들이네요.
일반인들도 의미있게 그곳에 갈 수 있다니 더 좋구요.^^

"미술관이 아니라 미슬관이라 함은 법적으로 인증을 받아야만 쓸 수 있는 ‘미술관’ 이라는 용어에서 점 하나를 빼, 일종의 언어적 유희를 꾀하였다. 또한 ‘아름답고 곱다’ 라는 ‘미슬’의 정의를 내리고, 아름답고 고운 공간 또는 시설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라고 설명하고 있더군요. 이제는 공간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지만 참 즐거운 추억이었습니다. ^^

이름 뜻이 재밌네요,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했어요. 덕분에 좋은 공간 많이 소개받았네요.. 잘은 모르지만 예술불모지로 보여지는 한국땅에서 꿋꿋히 자기세계 개척하는 작가분들보면 응원하게됩니다.

작가들의 애환이 느껴지면서도 그 생명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국에 있을땐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항상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하곤 했는데, 이 곳에 오고나서, 그리고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혼자 다닐때의 자유로움을 알게 됐어요. 소개해주신 이 공간들도 혼자 조용히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혼자 감상하는게 가장 좋더라구요. 100프로 자기 호흡에 맞춰서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겨야하는데 2명만 되어도 그 흐름이 자주 깨지기 마련이라서요.

저희 동네에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료로 전시를 해주는 곳이 있더라구요. 운영하시는분들도 작가분들이라, 전시를 하고 싶어하는 같은 처지의 작가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이런 공간들을 통해 작가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는것이 참 좋네요 :)

결국에는 모든 작가들이 1인당 1공간을 운영하는 모습은 어떨까.. 가끔 상상해봅니다. 유툽 채널처럼요. 경쟁은 정말 컨텐츠로만 승부할 수 있구요. 음..궁금하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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