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지각(空間知覺)능력 vs 상황인지(狀況認知) 능력

in #kr-diary6 years ago (edited)

나는 공간지각(空間知覺)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지도를 잘 못본다. 대학 때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는데, 한 달동안 여행하면서, 남들은 지도가 너덜너덜 해졌는데, 내 지도는 한달 후에도 새 것처럼 빳빳했다. 나는 그냥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일행이랑 보통 같이 이동하는데, 하루는 나 혼자 이탈해서 다니다가, 로마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하루는 일행이 나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는데, 그 때 한 여행사에서 패키지로 묶은 일행들이 그날의 사건을 “북키퍼 실종사건”이라고 회자하며 이야기꺼리로 삼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구글맵이니 무슨무슨 앱이니, 길치들의 천국이 되었지만, 그 때는, 그것도 해외에서 길을 잃으면 낭패스러운 상황이 될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겁은 나지 않았는데, 평소에 나의 성향을 아는 일행들은 국제 미아가 될까봐 나를 엄청나게 찾아 다녔다고 한다. 일행들이 거의 언니 오빠들이어서 더 그랬을 거다. 나는 오히려 혼자 돌아다니다가, 왠 느끼한 이태리 남자가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로 무사히 돌아갔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언니 오빠들이 아주 보고싶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그 때는, 아주 많을거라 생각하고, 행운처럼 다가오는 그런 기회를 바보같이 놓치면서 살았었다.

어느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 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쇼코의 미소] 중.

그리고 문득 나를 태워줬던 이태리 남자가 떠오른다. 곱슬 긴머리를 하고 땀을 팥죽같이 흘리면서 못하는 영어로 계~속 뭐라뭐라 이야기 하며 나를 데려다 주고는 마지막으로 던지 한마디... 세상 느끼하고 굵게 읽어주길 바란다.

“I have an intimate feeling from you”

그 이후로 나는 긴 곱슬머리 남자를 이태리 머리를 한 남자라고 부른다. 그때는 고마웠다 곱슬머리 이태리 남자야, 아쉽게도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이태리 남자 이야기 하려고 시작한게 아니고, 그 공간지각 능력과 관계하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도 보는 법, 그리고 또 운전이다. 주차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갔던 곳, 지나던 골목이라도, 그 거리나 공간에 대한 정보 저장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

처음 여기 오고 줄곧 기사를 쓰다가, 기사들 대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WAZE나 구글앱으로 충분히 내가 길을 찾아 다닐 수도 있겠다 싶어, 운전 면허를 현지 면허로 바꾸고 운전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계속 운전을 했었지만, 회사-집-회사-마트-집... 의 루트만 다닌터라, 그리고 기본적으로 스피드에 겁을 내는 편이라, 그래서 나는 스키도 잘 못탄다, 처음 한 달동안은 정말이지 날마다 간이 콩알만 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달을 잘 다니고도, 매일 지나는 골목에 있는 전봇대를 들이받아서 차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나ㅠ 내 차 빼면서 가만히 대기하던 남의 차를 받지를 않나... 내가 모든 차는 SUV차량인데, 일주일에 한 번 color coding(차량 10부제 뭐 이런거)에는 신랑이 몰고 다니는 세단을 타는데, 그 차만 타면 그렇다. 기본적으로 낮아서 시야가 확보가 잘 안되고, 차에 흠집을 낼 때마다 신랑이 정비소 가기를 몇 번을 하고 나더니, 아 모르겠다. 니 맘대로 박살을 낼 때까지 기다릴 테니 이제 정비소 안갈란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더 이상 사고를 안 낸다.

그리고, 차 이야기만 하면, 우리신랑은 이 이야기를 꼭 해서 와이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처음 신랑이 먼저 와있고, 내가 한 6개월을 한국에 있다가 들어왔는데, 신랑이 3개월 정도 후에 들어와서 먼저 중고차 거래소에 가서 우리차 견적을 받아놓고 필리핀으로 갔는데, 나중에 내가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 중고차 거래소로 차를 가지고 가니 처음 받은 견적에서 50만원이나 제하고야 말았다. 속도를 안내니까 큰 사고는 안났는데, 회사 주차장에서 이리 박고 저리박고, 긁히고... 회사에 주차하고 한 번은 남의 차를 박았는데 약간 스크래치가 난 걸, 너무 경황도 없고 지각할 거 같아, 나중에 처리하자, 생각만 하고 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주차장으로 가 보았다. 다행히 CCTV는 그 자리에 없었다. 범인들은 꼭 자신의 범행현장을 다시 찾는다. 그 심리를 그 때 나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임원들 말고는 과장 이상만 무료 주차권을 발급 받았는데, 나는 그 때 대리였지만, 차 안가지고 다니는 과장님께 주차권을 받아서 사용하던 터라(그리고 내가 주차하던 지하 6-7층은 과장님들 자리), 분명히 과장님 중 한 분이라 생각하고, 과장님들만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이상한 버릇이 생기기도 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퇴근하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편의점 앞에 깜빡이 켜놓고 계산을 하는데, 지나가던 마을버스가 내 차를 찌이익 심하게 소리를 내며 긁고 지나가는 것이다.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지나가던 사람들 다 와서 보고, 장사하는 분들 다 참견하고... 기사 아저씨가 사색이 되서 내리려는데, 여기저기 이미 긁혀있고, 크게 표도 안나서,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아저씨...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기사아저씨는 당황하고...ㅋㅋ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지털라이즈드(Digitalized) 세상에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Analogue) 인간이다 나는. 뭔 말인고 하니, 우리 신랑은 늘 나에게 말한다. 넌 아이폰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이폰 기능의 10프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굳이 내가 아이폰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른 기종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걸 쓰면서 익혀야 하는 걸 하기 싫고, 못해서.. 그 스트레스가 싫어서 나는 아이폰을 고집한다. 그리고, 집에 있는 모든 인터넷 기기며, 게임기들, 하다못해, 신랑이 인터넷으로 티비 보라며 달아놓은 그 뭐시기 뭐시기의 시스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터넷에, 혹은 그런 기기들에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멘붕이 온다. 뭘 알아야 누굴 부르고 말고 하지. 이게 무슨 공간지각 능력이랑 관련있나 하겠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나의 뇌 속에는 그것들을 관장하는 어떤 부분이 결여되었거나, 아예 없다.

신랑이 출장가기 전날, 밖에서 무한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기기라며 사들고 왔는데, 요렇게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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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잘 되던 기기가 계속 꺼졌다 켜지고 꺼지고 켜지고를 반복한다. 불량인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가지고 가서 환불을 하든지 새걸로 바꿔오라고 했다. 난 몰라. 뭔지도 모르고 사용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해 몰라, 나 못해... 그냥 알기도 싫고, 배우기도 싫고, 나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그냥 아날로그로 살게ㅋ 일주일 안에 가야 바꿔준다고, 요래요래 설명해 주는데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그런걸 사오고 또 나보고 가서 처리하라는 신랑한테 짜증만 났다.

그리고 오늘, 둘째를 데리고 와서 밥먹이고 씻기고 나서, 격전지로 향했다. 먼저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아차... 그생각을 못했다.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어디 찾아보란다. 집에 갔다. 찾아봐도 없다.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한다. 자기 가방을 보더니 없단다. 지갑에도 없단다. 잘 안 챙긴 것이다. 일단 바코드 있고 월요일 오전에 샀으니까 자기들이 확인할 수 있을거니 가보란다. 다시 갔다. 바코드 보이지? 확인해봐... 우리 남편 영수증 잃어버렸대ㅠㅠ 니들이 확인 좀 해 줘봐... 그랬더니 안된단다. 자기들 정책상, no receipt no refund or exchange 란다. 영수증도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시킨 신랑이 미웠다. 전화했다. 영수증 없어서 안된대. 아몰랑. 니가 처리해 와서. 난 일요일 되야 돼. 내일 온다며. 미안. 미팅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면 그냥 됐으니까 잊어버려. 새로 하나 사지뭐... 라는 말에 갑자기 전투력이 솟아오른다. 멀쩡하게 돈 주고 사놓고, 불량이라 바꿔달라는데 영수증 없다고 안된다고... 이곳 아이들의 특징이 바로, 교육받은 대로 그 노선에 따라 착착 일을 하고, 아무리 아무리 다른 상황이 되어도 다르게 대처하는 융통성이라고는 없다. 신랑도 말했다. 걔들은 배운대로 시킨대로 할 뿐이니 영수증 안 챙긴건 내 잘못이니 그냥 넘어가자고... 그렇다면? 그들의 정책과 교육과, 노선에 없는 이슈를 만들어 보자. 뭐라는지. 나는 공간지각능력은 없지만, 상황인지(狀況認知)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그다음 일은 임기응변이면 충분히 승산있다.

: 그렇구나.. 충분히 이해해 너희의 정책. 근데 말이야. 너희도 생각해봐. 난 이걸 돈주고 샀고, 불량인걸 알았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잖아. 월욜날 이걸 우리 신랑한테 판 직원 좀 불러줄래?
직원: 넹.(얘들은 상황에 따라 토스 되는대로 일한다.)
그직원: 왱?
: 니가 이걸 우리 신랑한테 팔았잖아. 영수증이 없어서 환불도, 교환도 안되는건 customer service 쪽 입장이고, 물건을 판 사람은 너니까, 니가 좀 책임져 줄래? 난 환불도 필요없고, 교환도 필요없어. 이 물건을 제대로 사용만 하면 돼. 그러니 이걸 작동하게만 니가 만들어주면 나는 노 프라블럼이야. 응응??
그직원: (멘붕)... (교육 받은 적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저런 사람 처음봤다...)
: 이해했지? 내가 보기에 넌 여기서 오래 일했고, 충분히 능력있어 보여 부탁하는거야... 미리 고마워... (나는 절대 화내지 않는다. 자존심을 살짝 건드렸을 뿐)
그직원: 아... 근데... 시간이 좀...
: 오... 돈 워리...나 한가해.. 기다릴께... 시간 가지면서 고치렴...

그러고 그 앞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앉아있었다. 거의 전 직원이 몰려들어서 뭐라뭐라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삼십분 후, 나에게 와서는 업그레이가 필요하고 어쩌고 저쩌고.. 고뤠~?? 그렇게 하렴... 한시간 후, 기기에 무슨 칩이 필요하고 어쩌고저쩌고... 원더풀하구나.. 그걸 알아내다니... 꼬박 두시간이 지났다. 그 직원이 다시 온다.

그직원: 자 이거 다 업그레이드 되고 이제 작동돼.
: 사실이야? 진짜야? (개뿔, 새제품인거 나 다 알거든?)

그리고 나는 작동되는 완전한 새 제품을 들고 와서,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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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지각(空間知覺)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은 부족한, 혹은 없는 능력이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 잘하는걸로 칭찬하지, 앞으로 나한테 못하는 걸 가지고 타박하지마 알았어?

라고 신랑에게 결과보고 톡을 보냈다. 아직 안읽었는데 뭐라는지 기다려보자. 흥

방금 답이 왔다.

와.. 대박이다 너... 멋지다....
거기 인제 어떻게 가냐... 챙피해서...

ㅠㅠㅠ 그러게 왜 그런걸 시키냐고... 난 부하직원형 인간이라 누가 시키면 다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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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능력자이십니다. 남편들은 그런쪽은 잘 못하더라구요 ^^

내말이요. 말소리 커지고 논쟁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무조건 피하고자 하는...

와 ㅎㅎㅎㅎ 마지막 부분 무슨 히어로물 보는 줄 알았습니다. 공간지각 따위 ^^

개나 줘버리면 되겠습니까?ㅋ

스고이네^^~대단해~
멋지심닷

스고이네~~~ 사랑이 엄마가 생각이 납니다 하하

아공 고생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토닥 토닥이 필요했네요.^^;;

아 별로 수고안했어여ㅎㅎ 덕분에 시원한 곳에 앉아서 책읽고 인터넷 하고 핬어요 ㅎㅎ

저 기기는 구형인 것 같은데요. 신랑님이 속고 사신 게 아닐까요? 아니면 좋은 거지만요,

ㅎㅎ 아이들 밖에서 게임하고 유튜브 보고 할 때 쓰라고 산거라 최고신형은 아닐걸요? 속지는 않았을거에요. 우리신랑 IT 전문가 ㅎㅎ

남자들은 열에 아홉은 그리 못합니다. 남편분이 일부러 그런거는 아닐까요? 마눌들은 말을 통한 협상에 참 능한듯해요. 타고 난거죠. 보람찬 하루군요..축하합니다...

남자들은 왜그런가요? 마눌들한테는 이래저래 잘도 컴플레인 하면서 밖에서는 순한 양

그러게요. 저도 그럽니다. 허허허,,,씩씩한 마눌이 있어 행복하시겠어요. 남편분이,,

오오!! 멋지세요!! 저는 그런 말을 잘못해서...ㅠㅜ 저도 공간감각도 없는데 말주변도 없네요...ㅜㅠ 저도 둘 중 하나 주세요!ㅋㅋ

둘 중 하나? 제 공간지각능력 가져가세요 ㅎㅎ

ㅋㅋㅋㅋ저보다 나으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 덥썩!ㅋㅋ

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협상전략과 대응능력이..!! 한 수 배워갑니다^^

ㅋㅋ 어느 한쪽이 모자라면 그렇게 돼요 ㅎㅎ

부부들 간의 이런 일상적인 내용들 ㅋㅋ 너무 잼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그 때는, 아주 많을거라 생각하고, 행운처럼 다가오는 그런 기회를 바보같이 놓치면서 살았었다.

이 부분 너무 공감가는 말이네요. 그런 면에서 지금 제 주위 사람들도 잘 챙겨야 ㅜ

진지하게 읽다가 바로 담 이태리 남자에서 또 뿜고 ㅋㅋ 생각해보면 조금 위험할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큰 탈이 없었네요. 그리고 그 남자의 근자감... "intimate feelings for you"가 아닌 "from you"라고 말하는 자신감 ㅋㅋㅋ 대박입니다.

디지털 알레르기(?)가 있으신 분이 스팀잇에 가입을 하셔서 암호화폐 보유자가 되시고 가이드독 지킴이까지 하시다니! 남편분이 자랑스러워 하셔도 될듯 합니다 ^^

딱 그렇게 말했어요 I have an intimate feeling from you! 또박또박. 영어공부 하려고 나를 태운거 같았어요. 또 몇마디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넘 오글거려서 말 못하겠어요 ㅎㅎㅎㅎ

  1. 일단 북키퍼님 주변에 차를 세우면 안된다.
  2. 북키퍼님 남편분 심정 1000000000000 % 이해 한다.
  3. 창피해서 못갈것 같아도 남편분은 다시 가지 싶다...(내가 그러니까.. ㅠㅠ;)

ㅎㅎ 가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삿대질을 안했는데ㅜ 그냥 배째라 하고 앉아있었는데 그게 그리 챙피한가요?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이제는 안박아요. 운전 잘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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