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친구가 보고 싶을 때

in #kr-diar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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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있다.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자주 보기도 했다. 자취할 때도 같은 건물이거나 옆 건물에 있어서 자주 만났다. 그 친구는 2학년을 마치고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휴학을 신청했다. 공무원 수험생 3년차 되던 해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두고 나에게 "이번에 떨어지면 그만 할거야.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우리 집에서 30분 이내 거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2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대학교에 입학해서 다시 보게 된 친구가 있다. 나는 경영학과, 그 친구는 회계학과라서 같은 단과대학이다보니 은근히 자주 마주친 것 같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로 2학년을 마치고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휴학을 신청했다. 올해 수험생 4년차가 되었고, 다음 해에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열람실에 가면 찾을 수 있다.
#3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조언해주시면서 다른 길로 유도하셨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내내 이어진 부모님의 권유를 애써 무시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모든 기업의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는 작게나마 사업을 해보려고 했다. 사업자 등록과 스토어팜 오픈 등등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는 찰나에 아버지께서 대화를 하자고 하셨다.
#4
그동안 지겹도록 들어왔던 세무사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99%의 확률로 나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구체적인 내용은 스팀잇에서 말할 수 없다. (경제적인 지원을 끊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의 사건과 연계되어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마치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으면 반드시 죽는 것과 같은 법칙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날 부터 수험행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인에게 이별통보를 받았고, 전화번호부에 있는 모든 연락처를 지웠다. 그리고 주말을 포함해서 매일 10시간 이상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5
첫 번째 시험은 전체 과목에서 1문제가 모자라서 불합격 했고, 두 번째 시험은 한 과목이 과락이라서 불합격 했다. 나는 이제 시험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합격률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매너리즘에 빠져있기 때문에 글자가 읽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절실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큰 고생을 하지도 않은 것 같다. 부모님께서 세법, 회계, 상법 등에 지식이 있으셔서 중산층의 경계에 있었던 것 같다. 인터넷 강의를 들었을 때, 어느 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수능까지는 부모님께서 돈을 쏟아부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이름있는 대학에 보낼 수 있어요. 하지만 대학 이후에 치르게 되는 시험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아요.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 내가 필요하고 하고 싶어야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는 시험들 밖에 없다구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 두세요. "
#7
예전에도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조언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누리는 것이 좋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나와 동생은 최대한 빨리 부모님의 곁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계신다. (내 동생도 올해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회계사 수험생이 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하고 있다.)
#8
앞서 이야기했던 두 친구는 과거에 어떤 생각을 했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화번호를 지우기는 했지만, 찾으려면 금방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기 때문에 찾아가면 바로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과 결정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고, 내가 슬플 때가 가장 슬픈 순간이다. 나의 고민에 대한 답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외면하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스스로 힘든 상황에 몰아넣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의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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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부모라는 틀 안에 있음을 느낄 때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부모는 그렇게 우리의 무의식인 듯 합니다. 무의식의 의식화. 삶의 또 다른 정의란 생각입니다. 의식되야 비로소 자유로와질 가능성이 생기는 듯 합니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혹은 부모로부터 자유로와지길 소망합니다.

헌데 저도 모르게 아이들을, 아니 이젠 어른인 걔들을 옥죄고 있는 저를 또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외면하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스스로 힘든 상황에 몰아넣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힘든 이야기를 적을 때, 특히나 그것의 형태가 절망과 맞닿아있다거나 그렇다고 스스로가 인지하는 경우, 한 글자 한글자 적어내는 게 실로 고통스럽습니다. 물론 적어낸 후에는 한편으론 대견스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픔이나 슬픔을 대면하게 되는 경우, 저 역시 가장 처음 하는 것은 회피나 외면인데, 모르는 척, 아닌 척,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당시에 넘기고는 뒤늦게 혼자 삭이는 형태를 취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혼자 속병이나곤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허비했다고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있었기에 조금 더 견고한 내가 되는 게 아닐른지 생각해봅니다.

요며칠 비슷한 연유로 이틀반 가량을 앓아누웠어요. 그건 단지 괴롭고 고통스러움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정신이 아닐정도로 많이 아팠는데, 인내와 번뇌, 통찰을 하기 위한 성찰과 고찰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허비했다고 여겨지던 그 시간이 되려 선물 같다고 느껴지는 때가 오시리라, 내심 기원합니다.

적어놓고 보니 이게 뭔 넉두리인지 잘 모르겠어요.ㅎ

으악..민망하게 이건 댓글이 도배 수준이 아니라 테러수준이 되었네요....;;;;;;;;;;

한손님 공부를 하고 계시군요.
저도 한때 현실도피 차원에서 공부를 해본적이 있어요. 저는 부모님이 권하시지도 않았고 내 선택인데도 절실함도 없으니 열심일 수도 없고 그렇게 일단락이 되고 새로운 길을 찾았어요. 전 쉬운 길을 찾았나봐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쉬운 길을 찾는 다는 말은 나에게 맞는 길을 찾는 것일지도 몰라요. 지금 한손님이 마주하는 길은 부모님일 잘 아는 길이고 그 분들에게 확실한 길이지만 어쩜 한손님도 그럴수도 있다는 가정을 강하게 하면서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아니면 머리를 쓰던 떼를 쓰던 정말 이래저래 힘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자신을 잘 마주하고 바라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분들은 한소님이 떠올렸다면 연락해서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다 이유가 있는 일들일 꺼예요.
힘내세요~

한손님께서도 많은 고충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막고 있는 돌맹이가 크게 느껴지실지 모르겠지만 실제 한손님은 엎드려서 돌맹이를 바라보고 있기에 크게 느껴지실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일어나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돌맹이 일거라 생각합니다
힘내세요!~ ^^

마음에 부담이 많았겠어요. 힘드셨겠어요. 언젠가 꼭 금손 되실겁니다.

부모님의 압박과 기대는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지요..ㅠㅜ 정말 빨리 집에서 나오고 싶은게 맞다면 시험을 보고 독립을 하신 후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글을 읽고나니 많은 고민이 되실것 같습니다...응원 해드리고 싶네요 힘내시고 마음가시는데로 힘차게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한손님~홧팅♡

마지막 즈음에 강사님의 말씀이 확 와닫네요.. 저도 이제 곧 취준생인데 두려워집니다 흑...

대학 이후에 치르게 되는 시험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아요.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 내가 필요하고 하고 싶어야 가까스로 통과할 수 있는 시험들 밖에 없다구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 두세요.

학원 선생님이 한 말이 와닿네요. 저도 한 때 수험생활을 했었거든요.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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