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닥터지바고 -- 라라의 테마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명동성당에서 을지로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중앙극장은 <닥터 지바고>를 앙콜 상영했고 나는 거기서 이 영화를 봤다. 엄청나게 큰 화면 이었다. 인간의 운명은 신도 거역할 수 없다는 듯이 슬픔이 뚝뚝 베어나는 주제곡 <라라의 테마>가 잔잔하게 깔리고 8살 유리 지바고는 엄마를 잃고 슬픔에 잠긴다. 관이 메마른 땅 밑에 눞혀지자 삭풍이 불어와 깡마른 낙옆들을 우수수 관 위에 흩뿌린다. 아, 나는 그 첫 장면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죽은 자의 관,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그 바람에 이리저리 대지를 떠도는 고엽들. 앞으로 전개될 지바고의 고난에 찬 삶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바람은 미친듯이 불어댔고 영화는 음산한 잿빛 화면을 페이드 아웃시킨다.

<닥터 지바고>는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삶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한 작품이다. 지바고는 시베리아 부유한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가 10살 때 세상을 뜨고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고아가 된 지바고는 모스크바의 지식인 집안에 맡겨지는데 그는 의학을 공부한 뒤 결혼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종군의사로 전쟁터에 나간 그는 라라 라는 간호원을 알게 된다. 라라는 지바고의 집을 파산시킨 변호사에게 능욕을 당했던 적이 있었으나 지바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후 두사람의 사랑은 여러번 어려움에 부딪치지만 지바고는 지병인 심장발작을 일으켜 불운했던 삶을 끝마치게 된다.

영화에서 남주인공 지바고의 삶에는 파스테르나크의 신산한 삶의 흔적이 뭍어있다.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가가 될 생각이었으나 나중에 철학을 공부한다. 그 뒤로 문학에 입문하여 시와 소설을 쓴다. 그는 혁명 전후를 살아낸 인텔리겐찌아로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시는 공산당에서 요구하는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한참 동떨어졌었다. 회색빛 지식인이어서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쫒아 다녔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 역시 혁명에 회의적인 지식인으로서 과연 혁명이 인간의 삶에 던지는 의미에 대해 회의한다. 영화는 역사가 일으키는 풍랑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전체주의 체제의 폭압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다.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혁명에 동조하느냐 않느냐는 곧 죽음이냐 삶이냐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도 파탄을 맞고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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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는 그로메코가(家)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그는 1912년 어느 겨울 밤, 크렘린 궁성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사회의 여러 뒷면들을 접하게 되고, 의학을 공부해 빈곤한 사람들을 돕고자 꿈꾼다. 그는 그로메코가 고명딸 토냐와 장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의학실습에 몰두하는데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마주친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에게 정조를 빼앗기자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상을 입힌다. 지바고는 다시 한번 이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이미 혁명가 파샤라는 연인이 있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우연히 종군간호부로 변신한 라라와 반갑게 해후한다. 1917년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지바고와 같은 지식인은 제일 먼저 숙청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랄 산맥의 오지 바리끼노로 숨어 든다.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 생활을 보내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시내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그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지바고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밀회를 지속한다. 그 뒤 빨치산에 잡혀 강제 입산을 당한 지바고는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전차에서 내리는 라라를 보고 황급히 뛰어가다 심장마비로 절명한다. 이것도 모르는 라라는 내란 통에 잃어버린 지바고와 사이에서 난 딸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는 지바고와 라라가 한적한 숲속 저택에서 몸을 숨기고 쫒기면서 서로를 애타게 사랑하는 장면이다. 눈과 얼음에 덮여있는 유리아틴의 저택에서 불안과 공포가 온몸을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지바고와 라라는 꿈꾸듯 사랑을 나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지만 이들에게 오로지 사랑만이 그 불안을 벗어나게 하는 묘약이었다. 지바고는 자신의 품에 안긴 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이 슬픔이나 회한 같은 걸 하나도 지니지 않은 여자였다면 난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오류를 범하지 않은 그런 사람을 좋아 할 수가 없소.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단 말이요."

라라의 테마

그대여 어딘가에 노래가 있을 거에요
비록 눈이 봄의 희망을 덮고 있더라도 말이에요
언덕 너머 어딘가에 푸르고 금빛나는 꽃들이 피어나고 있지요
당신의 마음을 지탱시켜 줄 꿈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나게 될거에요 내 사랑

언젠가 겨울을 이기고 따뜻한 봄이 올 때
당신은 내게 올 거에요
바람처럼 따뜻하고 눈의 입맞춤처럼
부드럽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라라, 내 사랑 이따금씩 절 생각해 주세요
신이여, 내 사랑의 성공을 빌어주세요
당신이 다시 내 사람이 될 때까지
눈의 입맞춤처럼 부드럽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신이여, 내 사랑의 성공을 빌어주세요
당신이 다시 내 사람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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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남긴 유일한 장편 소설 '닥터 지바고'는 문학 내외적 인생이 집약되어 있는, "소련 반세기만에 처음 나온 문학 작품"으로 불리는 소설로 평가 받는다. 공산당 집권하의 소련에서는 출간이 금지되었으나 그 원고가 서방세계로 반출되어 출간, 1956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지명된다. 그러나 소련 정부의 저지로 수상은 거부되었고,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영화 <닥터 지바고> 역시 1994년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에서 첫 상영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22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품 활동을 중지당하다시피 했던 그는 생애 마지막 창작열(1945-1955)과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소설에 쏟아부었다. 여기에는 그가 직접 겪었던 혁명과 내전 전후 20여 년의 역사와 시대 상황, 역사와 개인의 운명적 갈등, 남의 여자를 사랑했던 경험, 우랄 지방에 채류했던 경험, 인물들의 세계관으로 표현되는 깊이 있는 철학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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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개별 인간의 삶을 무자비하게 짓밟는다. 혁명이라는 대의 명분은 모든 사람의 삶을 온전하게 놔두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가담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된다. 이 영화에서도 지바고는 방관자적 지식인으로서 비겁한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혁명보다는 사랑과 인간적 삶이 더 소중했다. 반면 라라의 연인이었던 파샤는 혁명의 대의에 몸을 바친다. 어떤 삶을 선택했든 심하게 요동치는 역사의 물결 위에 가랑잎새처럼 출렁이는 개인의 비극적 결말만 있을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시간만이 승리자였다.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사랑 속에서 잠시나마 역사가 부과했던 삶의 고통을 잊었던 두 연인의 삶은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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