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주절주절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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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일기가 내 글쓰기 호흡과 잘 맞는 것 같다. 한 가지 주제에 몰두하는 것보다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쳐내지 않고 다다다다- 쏟아내는 게 편하다. 나의 번호 일기는 내 의식 흐름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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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이동 중에는 잘되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멍 때린다. 오늘은 그간 쌓인 일들을 정리하며 번호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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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식사는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버거 세트였다. 나는 맥주와 탄산수를 제외한 탄산음료를 일절 먹지 않아 햄버거 세트도 커피로 바꿔 마신다. 맥도날드 아이스 커피는 추가 금액이 없고, 아메리카노는 1,000원을 추가해야 한다. 기분에 따라 다른데 오늘은 돈이 아까워 아이스 커피를 선택했다.

햄버거를 커피와 함께 먹어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탄산음료를 먹지 않지만, 햄버거와 콜라를 같이 먹는 이유를 커피를 마시자마자 몸으로 느낀다. 햄버거와 커피는 최악의 궁합이다. 게다가 맥도날드 아이스 커피는 특히 더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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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라밸'을 맞추려 노력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하루에 커피 한 잔만 먹는다. 건강을 위해 참는 것이므로, 그 한 잔이 무척 중요하다. 애매한 것은 오늘 같은 날이다. 맥도날드 아이스 커피를 한 잔으로 생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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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한 시간이나 타야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셔도 된다는 궁색한 변명을 찾았다. 정류장 근처 카페에서 1,000원짜리 커피를 팔고 있었는데, 맛이 없을 것 같아 평소 자주 가는 카페로 갔다.

가다 보니 날도 덥고 비효율적인 것 같아, 반쯤 온 길을 되돌아가 1,000원짜리 커피를 샀다. 그 와중에 맛있게 먹겠다고 샷을 추가했다.

정류장에 오자마자, 커피를 버스에 못 들고 탄다는 것이 생각났다. 장난처럼 내가 탈 버스가 전 신호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래서 샷 추가한 커피를 단번에 마시고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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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일상의 화두는 아끼던 마우스를 잃어버린 것, 그리고 새로운 안경을 맞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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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던 마우스는 정확하게는 로지텍 MX Master 2S. 잃어버린 날, 잠을 설쳤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린 게 얼마 만인지. 최근 가장 큰 상실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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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건 잃어버리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사람이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지갑이 20개는 될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대개 카드 하나만 들고 다니거나(카드를 잃어버린 횟수는 40번 정도), 필요에 따라 10,000원 미만의 천 쪼가리에 명함이나 쿠폰 같은 걸 넣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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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물건 잃어버리기' 이야기가 나오면 은근한 배틀이 시작되곤 한다. '난 여기까지 잃어버려봤어!' 식이다. 대개 이기는 사람은 나였다. 나에겐 강력한 한방이 있다.

기타를 잃어버렸었다. 더 정확하게는 에피폰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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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기타리스트를 꿈꿨다.

여러 팀과 함께하는 공연이었는데, 우리 팀원의 기타를 챙기다 미처 내 기타를 챙기지 못했다. 집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내 등에 메고 있던 게 내 기타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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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맞바꾼 것이었다. 엉엉 울었다.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때 공연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내 기타를 보지 못 했냐고 물어봤지만 모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난 그들 중 한 명이 가져갔다는 걸 확신하면서, 내 기타를 가져간 그 사람을 평생 불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당연히 내 실수였지만, 그때는 누구 탓이라도 해야 마음이 풀렸다. 그러고 나서 돈이 없어 콜트 기타를 샀던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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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운 좋게 마우스를 4번의 통화를 거쳐 찾게 되었다! 워낙 복잡하게 꼬여있어 주말 지나고야 받을 수 있지만, 찾았다는 게 기적이다. 아직은 따뜻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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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안경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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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시와 짝눈이 심해 공연 때는 일회용 렌즈를 낀다. 며칠 전 공연 때 렌즈를 꼈는데, 오랜만에 껴서인지 몹시 불편했다. 이물감을 참지 못하고 공연 4분 전에 급하게 렌즈를 뺐다. 이런 식의 도박을 계속할 수 없어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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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맞추기는 연례행사다. 첫 번째 안경은 너무 어지러워서 한 번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버렸다. 두 번째 안경은 안경이 너무 잘 흘러내리고, 초점이 안 맞아 쓰다가 말았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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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검사를 하니 안경사가 그간 이런 눈으로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봤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시력 차도 심하고, 한쪽은 난시가, 한쪽은 근시가 심해 일상생활에서 매우 어지러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간의 만성적인 피로가 왜곡된 시각에서부터 오는 것이었다니. 나는 당황해 "제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라고 대답했고, 나의 바보 같은 말엔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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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두 개의 안경은 꽤 비싼 값을 들여 맞췄다. 이왕 사는 거 '비싸면 좋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싼 돈을 들였지만, 그 돈의 1/10 값어치도 못 하고 버려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대한 저렴하게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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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선 두 개의 안경보다 어지럼도 덜하고, 착용감도 좋았다. 세상이 선명하고, 더 깨끗하게 보인다. 그래서 사고 회로를 바꿨다. '비싼 게 다 좋은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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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리하고 간단한 사고로 살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싼 게 더 좋겠지'라거나 '비싼 게 다 좋은 건 아니지'와 같은 생각 말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가볍게 뒤로 미뤄놓는 간편한 사고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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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세상이 크게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수학자들의 세상이 도래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면 수학적 사고를 안 하려하므로, 또 조금만 복잡해지면 거리를 두고 미뤄놓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그 안에서 자각하지 못하는 노예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고, 반쯤 카페인에 취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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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이 마치 안경을 벗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상을 표현한 것 같네요.
저도 남의 물건 챙기다가 여권, 신분증, 지갑(현금, 신용카드 여러장), 등본, 초본, 경력증명서 등등... 각종 서류가 있는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정말 아직은 따뜻한 세상을 느낀 것이 2시간 뒤에 역무실에서 찾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다 그대로였어요. 심지어 현금까지. 가방을 열어본 흔적이 전혀 없었어요. ^^

약간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며칠 쓰지도 않았는데 이제 안경을 벗으면 어질어질 합니다. 현금을 뺀 지갑이 다시 돌아온 적은 왕왕 있었는데, 현금까지 그대로였다고 하니 더욱 감동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저도 마우스를 찾았을 때 어찌나 다행이고, 감사하던지요 ㅠㅠ

네, 아직은 그래도 세상은 따뜻합니다. 현금이 되돌아 와서 정말 감동이었답니다. 진짜.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착하게 살려고 합니다.

번호 일기 재밌습니다. 햄버거와 커피의 조합은 상상이 잘 안 되네요. ㅎㅎ 마우스 찾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세트에 포함돼있는 콜라 가격이 아까워 바꾸기 시작한 것인데 좀 충격적인 조합이긴 합니다. 실은 햄버거보다도 감자튀김과의 조합이 아주 좋지 않아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마우스 받아오고 싶네요.

아... 저도 물건 잃어버리기 선수입니다.
결혼하고는 많이 줄었지만 지갑은 특히 자주 잃어버려서
지갑을 잃어버릴때는 의무적으로 반성의지갑? 인 명함지갑을 가지고 다니곤했지요.
지금은 아예 지갑없이 핸드폰 케이스 수납을 이용하는데 굉장히 편하답니다 ^^;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잃어버리는 것이 지갑과 카드인데 ㅠㅠ 카드가 들어가는 핸드폰 케이스는 왠지 안쓰게 되더라고요. 왠지 제 마지막 종착지가 핸드폰 케이스 지갑일 것 같긴 합니다. 습관을 바꿔야하는데 쉽지 않네요!

수학자들이 수학적 사고 안하고도 잘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줄거에요! ㅎㅎ

계도님은 제가 아는 수학자 중 한 분이신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쁜 마음으로 믿어 보겠습니다. 코인 시장을 곁눈질로 보다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이미 기술도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고, 발 맞추기가 어렵네요.

제가 수학자라니요 ㅎㅎ

오늘도 충만한 하루 되세요^^

이시스님 오랜만입니다.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도 탄산수는(콜라,사이다등) 안 마십니다. 맥주는 제외^^

저도 탄산수를 입에 댄 이후로는 탄산을 안마셔요. 탄산수에 얼음타주면 좋을텐데요. 커피성애자이지만, 햄버거는 소화가 안되서 탄산이 필수...ㅎㅎㅎ

탄산 음료에 들어가는 단맛이 이상하게 싫더라고요. 햄버거를 음료없이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셔야하는데 맨날 까먹고 같이 먹다 괴로움을 느끼곤 합니다 ㅠㅠ

스팀잇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노아의 방주'에 타 계신게 아닐까요? 나루님은 어떤 스타일로 기타를 연주하셨을까 잠깐 생각해 봤네요. 여러 에피소드들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번호일기의 호흡도 그대로 따라가는 맛이 있네요. 이쯤되니 나루님 앨범이 참 궁금한데 이미 세상에 나와 빛을 봤다고 하니 나루님 글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려 보려구요^^

번호 일기 너무 좋죠. 쓰기도 읽기도 너무 편안하다랄까요. 잃어버리기 이야기는 오늘 만난 어떤 분과 맞먹는 수준이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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