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나 돌아가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in #kr-pe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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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술을 진탕 마셨다. 실은 진탕은 아니고 평소보다 조금 더 마셨다. 막차를 타고 집에 와 바로 뻗었다. 일어났더니 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어제 술자리는 간단한 미팅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가 얼마 만인지. 처음엔 싫었지만, 마지막엔 내가 가장 즐거워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편안함과 즐거움, 그리고 의욕샘솟을 느꼈다. 티키타카 오가는 대화 속에서 계속 새로운 생각이 쌓였고, 나는 얼른 그걸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조화가 좋아 한 번 더 같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업을 열심히 해 그들과 또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전에 어떤 작곡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프로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아무도 모르는 영화, 보리스 레만의 장례식(죽어가는 예술에 대하여)이 떠오른다. 작년인가 재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영화다.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 찍은 본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자신의 죽음을 영화로 만들고, 직접 배우가 되어 연기했다.

보리스 레만은 500여 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생을 전부 영화에 바친 셈이다. 나는 그랬기에 스스로 마지막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과 만나면 대화의 내용은 대개 추억팔이가 된다. "그때 너 그랬잖아." " 그때 걔 그랬던 거 기억나?" 그러다가 술이 좀 들어가면 이런 얘기를 한다. "근데 나 지금 돌아가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거나, "한 번만 더 그 사람들과 다시 해보고 싶어."

나도 정말, 그때로 돌아가 그 사람들과 제대로 해보고 싶은 작품이 몇 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때보다 지금 실력이 더 나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때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간절히 바란다 한들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돌아간다 하더라도 다시 실수투성일 것이다. 막연하게 다음을 기약하면서, 혹은 너무 많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지금을 그냥 보낸 것도 같다. 이번 작품이 나의 마지막이 된다면 어떨까?


답 : 당연히 부끄럽고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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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인 것은, 설령 그렇더라도,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지는 않을 거잖아요? ;)

그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죠? ㅎㅎ (마지막이 되진 않겠지만요)

뭐, 그렇긴 하더라도.... 쓰읍.... ㅋㅋㅋ

ㅋㅋㅋㅋ 죄송합니다. 요즘 백수시기라 저도 모르게 부정적인 기운이 ㅎㅎ 감사합니다:)

미완성 교향곡을 남기고 죽은 작곡가도 아마 '부끄럽고 절망적이다' 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
십년전의 내가 해놓은 일들을 보면 어이없고 부끄러운 것도 많지만, 당시의 나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면 그 기록도 의미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당시의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가장 잘 알기에 깊은 부끄럼이 드는 것 같습니다 ㅠㅠ 따듯한 말씀 감사합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고싶어요.

글은 이렇게 썼지만 과거를 거의 돌이켜보지 않는 편이라서요.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고심은 하겠지만 결국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요. 전 지금도 좋답니다:)

어쩌면 스스로를 엄격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제가 그러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나는 항상 부족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말씀대로 최선을 다하면 미련도 죄책감도 없겠죠 아마도.. 글에서 응원받고 갑니다.
응원해요!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본인이 본인 삶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면서, 덜 엄격해지자는 마음도 함께 드네요.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아자아자!!

생을 전부 영화에 바친 보리스 레만이 존경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해 움직여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은 쉬워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미련과 후회는 접어두시고, 앞으로 있을 만족스러운 작품을 기대하며 현실에 충실한다면 부끄러울 일은 없으실 거에요!

나루님 응원하겠습니다 :-)

응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없겠지요.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려합니다. 감사합니다:)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과 만나면 대화의 내용은 대개 추억팔이가 된다.

대학 동기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그 때 함께 작업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추억팔이가 되더라고요. 우리 그 때는 그랬잖아. 그 때 그러지 않았니? 우리 그 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이제는 서로 아저씨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20대인데 말이죠. ㅠㅠ

지금 계획하시는 스팀방송국도 나중이 되면 즐거운 안주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플시님도 현재의 작업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뭘. 충분히 재미나 보이고, 열정 가득해보입니다:) 언제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언니야 도와주는겁니까? ㅋㅋㅋ 스티밋이라는 곳은 참으로 다양한 분들이 계셔서...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있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만나뵙기 힘든 분들을 이곳에서는 너무 쉽게 만날 수 있고 대화도 할 수 있어서요. ㅎㅎㅎ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나중에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

막상 도와달라고 하시면 또 그것 나름대로 심란해지겠지만...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나서서 도와야지요:) 먼 발치에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어떻게 흘러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ㅎㅎㅎ

모든 작품을 인생의 마지막 작품처럼... 모든 날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그 정도의 절박함과 간절함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문득 궁금해지면서 그런 불특정 다수에게 질투심이 끓어오르네요. ㅎㅎ

그러게요. 저도 늘 다음을 기약하면서 듣기 싫지 않을 적당한 정도로만 만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도 인생 마지막 작품처럼 몰두할 엄두가 나지 않네요ㅠㅠ

나루님 안녕하세요! :-) 이렇게 한 음악가의 일기를 읽을 수 있다니- 너무 좋아요.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ㅎㅎ

나루님 글을 읽고 나니 보리스 레만의 작품들이 궁금해졌어요. 500여 편의 영화라니- 대단한 의욕가이자 끊임 없는 영감의 소유자였네요! 한 편 제작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요. 그런 예술가의 생을 한 번 지켜보고 나면 괜히 제게도 그런 의욕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 그럴 때 조금이라도 진득하게 집중해서 작업을 하고 싶어지고요ㅎㅎㅎ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이 정말이지 저의 마지막이 된다면- 이라고 생각하니 진행 중일 때 (살아 있을 때!) 아카이브 정리를 차곡차곡 잘 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ㅋㅋㅋㅋ 좋은 일기, 영감을 주는 글 감사해요 나루님! :-) 현재의 작업도 응원합니다. :-)

한 음악가의 일기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요. 저는 오히려 그런 열정을 보고나면 약간 좌절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는 그래도 현재 작품에 조금이나마 더 집중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chaelinjane님의 글도, 앞으로의 작업도 더욱 기대하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면 정말 잘 할수 있을 것 같은데 ... 아마도 저는 똑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때도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정말 멋있는 어른 아닌가요? 정말 부러우면서, 멋있다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저도 몇 개의 작업은, 돌아가도 똑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때였던 것 같아요. 앞으로의 작업도 좀 더 많은 걸 쏟아 부어 열심히 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조금더 잘할수 있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네요 ^^; 힘들었기에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다시 힘들고 싶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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