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if] 사랑의 묘약 #1

in #kr-pen5 years ago (edited)

A short summary in English can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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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든, 영어로든 사랑의 묘약(The elixir of love)을 검색하면, 도니제티(Donizetti)의 오페라에 관한 자료가 주로 나온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은 비극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만큼 코믹한 오페라도 드물다.

섬세한 테너의 대명사 쥬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와 청량한 목소리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각자 부른 남몰래 흘리는 눈물

그러나 1832년에 초연한 이 오페라만으로 사랑의 묘약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 개인적으로 꼽아본 문화 속 사랑의 묘약으로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이외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 있는데, 이 포스팅에서는 우선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만 다루기로.

그 전에, 용어 설명을 잠깐 보기로 하자. 우선 '묘약'으로 번역되는 elixir는 그리스어, 정확히는 아랍어를 경유한 그리스어에서 나온 단어이며 중세 라틴어를 거쳐 영어 단어로 남았다고 볼 수 있다. el(엘)은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대략 맞는) 아랍어의 al(알; 아랍어 기호로는 ال)의 전형적인 알파벳식 표기이다. ('엘 시드'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iksīr는 '마른'(dry)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xēros에서 유래한 xērion(상처에 바르는 가루 약)을 계승한 결과이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말리는 행위에서 나온 용어이니, 일단 포괄적으로 '약'으로 보면 되겠다. 즉, 원래부터 특정한 목적의 약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elixir라는 용어는 문화적으로,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인 효능을 가진 약으로 정의되는 편이다. 중세부터 약을 통해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영생, 연금술, 그리고 사랑. 영생과 연금술이 어느 정도 이상의 계급과 지식을 가진 이들의 관심사였다면, 평민들이 마법의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누군가에게 의뢰할만한 것은 셋 중 마지막, 사랑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의 사랑을 갖기 위해 제조하는 모종의 '약'에 대한 민간 요법 역시 존재했을 것이고, 그런 약을 지칭하는 일상적인 명칭인 love potion도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심지어 현대에조차 레시피가 몇 가지 존재한다.

이 사랑의 묘약이란 최음제나 마약 성분을 이용해 제조한 음료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 찾아볼 수 있는 레시피들도 실질적으로 마법적 요소와는 상관 없는, 안정 효과를 주는 허브나 과일 따위의 재료를 넣은 것들이다.

그럼 문화 속 사랑의 묘약의 예시를, 트리스탄 신화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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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컨(John Duncun)의 트리스탄과 이졸트(Tristan and Isolt, 1912)

사랑의 묘약을 논하면서 중세의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 중 하나인 트리스탄(Tristan)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트리스탄 신화의 정확한 원형은 손실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썼다. 현재의 영국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엄청난 유행(?) 덕에 유럽의 모든 구석에서 트리스탄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라고는 하지만, 명확한 문학적 문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렇게 전해져오는 트리스탄 이야기를 아예 시인들의 창작으로 봐야할지, 실존 인물을 토대로 한 것일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다.

트리스탄은 자신이 섬기는 왕이자 삼촌인 마크(Mark)의 명을 받아 이졸데(Isolde)를 데리러 간 기사의 이름이다. 이졸데의 어머니는 나이든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기가 걱정되어 와인병에 사랑의 묘약을 넣어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것을 마시는 것이다. 둘은 사랑의 묘약을 나눠 마시고 연인이 되지만, 트리스탄은 어쩔 없이 왕에게 이졸데를 인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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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워터하우스(John Waterhouse), 트리스트럼과 이졸데(Tristram and Isolde, 1916)

어쩌면 트리스탄은 아서 왕의 심복이자 가장 뛰어난 기사로 묘사되는 '호수의' 란셀럿(Lacelot du Lac)의 원형일 수가 있다. 트리스탄 신화가 아서 왕 신화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고, 특히 란셀럿이 아서의 원탁의 기사들 중 한 명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늦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유사점은 트리스탄도 란셀럿도 왕의 아내가 된 여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트리스탄의 경우 이졸데와, 란셀럿의 경우 아서의 왕비 귀네비어(Guinevere)와 연인이었던 것으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여러 트리스탄 서사 중에서 비교적 나중에 나온 것에 따르면, 트리스탄도 아서 왕의 기사 중 한 명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이졸데가 아서 왕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떻게 보든, 트리스탄과 아서 왕(란셀럿) 신화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묘약의 경우, 단순히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야기 초반에 나눠 마시고 끝난 요소가 아니다. 그들의 행각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한 시인에 따르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마신 사랑의 묘약은 3년인가의 기간이 지나자 그 효능을 잃어버렸다고 하며,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 효과가 평생 갔다고 한다. 사랑의 묘약 따위를 마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3년 안에 사랑이 식었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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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브로치

그런데 3년 안에 사랑이 식었다는 트리스탄 이야기에서조차, 둘은 헤어지지 못한다. 둘의 관계는 결국 왕에게도 들키게 되고, 많은 우여곡절을 지나 트리스탄의 죽음과 이졸데의 자살로 결론을 짓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많은 요소들을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로미오와 줄리엣 줄거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오비디우스(Ovid)의 피라모스와 티스베(Pyramus and Thisbe)이 트리스탄 신화에 미친 영향도 상당히 뚜렷하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페라에서 사랑(liebe)과 죽음(tod)을 함께 묶어서, 신화에 대한 문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위의 브로치를 제작한 살바도르 달리는 이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크게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게 선사한 음악은 사랑과 죽음의 테마(Liebestod)이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바그너는 극심한 짝사랑을 영감으로 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그래서 두 연인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극대화하여, 죽음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플라토닉한 사랑에 머물다가 죽었다는 뜻일 수 있다. 바그너의 짝사랑이 그러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토마스 만 역시 이 바그너의 음악을 모티브로 단편 트리스탄을 썼는데, 마크 왕과 트리스탄, 이졸데를 둘러싼 일종의 근대식 패러디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여러 번 다뤄야 겨우 모든 요소들을 간단하게라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방대하다. 내용 자체가 방대하다기보다는, 트리스탄 서사의 문학적 장치들이 영향을 준 민속 동화와 문학작품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잠깐씩 거론만 하더라도 양이 엄청나지기 때문이다. 19, 20세기만 해도 트리스탄 열풍(?)이 다시 불어서,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39년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피네건의 경야(The Wake of Finnegan)에서라던가...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각도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어쨌든, 이 글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그들의 이야기에서 사랑의 묘약이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불륜적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겠고, 죽기까지 계속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동원한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트리스탄의 이야기를 다룬 보다 자세한 문헌을 읽어보면, 뭐 이렇게 구차하고 지긋지긋하게 이어나간 사랑이 다 있나 싶기도 하는데, 사랑의 묘약만큼 그런 부분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령 3년 안에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에서는 도피중인 두 사람이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는다. 그 결과 이졸데가 왕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돌아간 후에도 트리스탄과 다시 불타오르게 되는 전개는 골격만 있는 신화나 민속 이야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분명 그 원형이 되는 인물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사랑의 묘약에 해당하는 최음제 성분의 음료를 마셨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3자들이 보면 무모한 이런 사랑 이야기는 사랑의 묘약을 마신 결과로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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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라이튼(Edmund Leighton) 作, The End of the Song(노래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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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sndbox: This article is the fourth of my series on the classics of literature, history and philosophy; it is a project around which I wish to build a community. This particular post is on Tristan and Isolde, the myth and cultural motif. I have focused on the elixir of love, a subject I'll be dealing with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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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평론가의 경지에 오르신 글이네요. 혹시 문학평론가신지요. 아주 잘 봤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영화로 제작이 되기도 했죠. 관심이 있었지만 놓쳐버려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참고로 애니메이션 마징가에 나오는 아수라 남작의 경우 잠들어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닥터 헬이 그들의 반반을 붙여서 탄생시킨 인물로 묘사가 되었답니다.

ㅎㅎ감사합니다. 어느 해외 사이트에 문학 관련 이런 글을 쓰긴 합니다. 애니메이션에 대해선 전혀 몰라서 처음 들어보는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어쩐지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유가 있었군요. 어렸을때부터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거든요. 아마도 전국민적 인기를 얻은것일텐데요. 여러버전중에 그이야기가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포스팅된걸 보면서 생각이 났었네요.

ㅎㅎ감사합니다. 본업은 영어로만 쓰니까 한글은 이곳이 유일해요. 마징가 이름은 언젠가 들어봤는데 아마 요즘 애들도 알 듯 하네요.

최근에 개봉해서 알거에요. 아쉬운건 스토리였죠.

오늘도 좋은 음악 듣고 갑니다.
토요일 밤과 잘 어울리네요~~

아, 토요일 밤에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ㅎㅎㅎㅎ

내 외모...목소리,손짓 이 하나하나가 모여 만든 용서할수 없는 마약....그것은 바로 사랑의 묘약 킄킄킄킄

린정 어 린정!

린정하는 바입니다.!

저런 소름 받아주지 마세욥ㅠ

어? 미파 실물 못보셨어여? 허허....우리 @mipha 실물 영접하면 인정하게 됩니다. ㅋㅋㅋ

아...전에 밋업한다는 얘긴 들었죠. 저도 여기서 처음으로는 거지팸하고 볼거긴 한데...

오호...............'거기 대단한 지식인들의 팸' 그 밋업!! 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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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의 사랑의 묘약을 최음제라해버리니까 확 깨는데요 ㅋㅋ
차마 돼지애긴 참아요 ^^
오늘 보헤미안 랩소디 보고 왔는데... 좋았어요^^

ㅎㅎ 근대 이후의 시각으론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요. 미스 마플이었나 어느 캐릭터도 그런 말 했었다는...그 영화도 이제 개봉했군요.

사랑의
그래서 고양이가 사랑스러운건가 ?

트리스탄과 사랑의 묘약 메모메모 ... ㅋㅋㅋ

ㅋㅋㅋㅋㅋ

금요일밤에 어울리는 음악 잘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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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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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읽으면서도 내용들이 좀 복잡하구 어렵네요.^^
군데군데 나온 그림들이 뭔지 모르게 온화하구 따뜻한 느낌이네요.
마지막 사진은 그림인가요? 영화 캡쳐인가요? 그림같기두하그 아닌것 같기두 하네요^^
(디클릭 꾹~)

네, 고전주의나 고전적 대상을 표현한 회화는 따뜻한 게 많은 것 같아요. 저 별 그림?은 아마 그림이겠죠, 픽사베이 이미지예요. ㅎㅎㅎ

질문드린건 별그림 위에꺼였어요^^ ㅎㅎ
'노래의 끝'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잘 안될정도길래요^^

헉,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셨군요. 저건 그림이죠. 화가 이름이 밑에 적힌 라이튼이구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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