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28

in #kr-pen6 years ago


ⓒzzoya





  “슬슬 일어나야겠어요.”
  그 말이 순식간에 내 가슴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웨이터가 내 체크카드를 들고 사라지자 그녀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마요.”
  나는 그녀의 의도가 행위로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차단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첫 데이트는 남자가 사는 거죠.”
  “그건 고리타분한 생각이에요.”
  “뭐 어때요. 전 구식이 좋아요. 좋은 것에 한해서요.”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갑을 도로 넣었다. 그때 웨이터가 헛기침하며 다가와 영수증과 함께 볼펜을 내밀었다. 서명하려던 나는 웨이터가 내민 게 영수증이 아니라 사실은 쪽지이며 거기에 쓰인 글이 나를 아연실색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발견했다. 잔액이 부족해 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명 대신 기다려 달라고 황급히 적고는 웨이터를 올려다보았다. 웨이터는 내게만 보이게 살짝 윙크하고 자리를 떠났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나는 곧장 계산대로 달려갔다. 사려 깊은 웨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웨이터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베니토, 당신은 제 은인이에요. 문제 해결을 위해 잠깐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베니토는 굳게 다문 입으로 미소 지으며 계산대의 전화기를 집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내가 아는 이들의 번호는 다 외우고 있었기에 누구에게 전화할지가 유일한 문제였다. 파커 씨는 온라인 뱅킹 따위의 취미는 없으니 당장 도움을 받기란 힘들 터였다. 나는 동네 친구 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돈이 없어 곤란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길한 상상이 점점 뚜렷해지다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단 세 사람만이 목록에 남은 것이다. 엄마, 지미, 수지 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지미에게 연락해야 했다. 만약 지미와의 통화에서도 진전이 없으면 차라리 파커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용을 보증해 달라고 하고 외상으로 달아두는 게 나을 것이다. 이곳은 구식이니까 요즘은 찾기 힘든 과거의 미덕이 남아있으리라. 다행히 지미는 전화를 받았다.

  “빌어먹을. 네 도움이 필요해.”
  “잠깐 기다려 봐. 실종 신고 낸 거부터 취소하고.”
  나는 지미의 시답지 않은 농담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돈 좀 꿔 줘.”
  “얼마?”
  “음…… 80, 아니 100벅스.”
  베니토에게 팁을 후하게 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쳐 말했다.
  “센터로 와. 아직 연구실이니까.”
  “계좌로 쏴 줘.”
  “그건 곤란한데.”
  나는 슬슬 밀려오는 짜증을 꾹꾹 누르고 성숙한 인간의 의지를 발휘해 참을성 있게 물었다.
  “왜?”
  “어…… 난 인터넷 뱅킹이 안 돼.”
  “뭐? 그게 말이 돼?”
  “돼. 내가 왜 매번 널 직접 만났겠어?”
  “생색내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뭐 그런 이유도 있었지.”
  지미가 웃으며 말했다. 어이없지만 거짓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가게 주소를 불러 주고 통화를 끝냈다. 자리로 돌아오니 작은 그릇에 담긴 젤라토가 탁자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작은 숟갈로 아이스크림을 살살 긁으며 말했다.
  “서비스래요.”

  베니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산대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베니토는 물론이거니와 이곳을 추천해 준 파커 씨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쫓기던 마음이 넓은 들판에 들어선 듯 여유가 생기자 문득 수지 큐가 생각났다. 이렇게 좋은 곳을 함께 오지 못한 게 아쉽고 미안했다. 수지 큐와는 파커 씨의 표현대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메뉴를 갖춘 퓨전 비스트로, 유명 블로거가 추천한 유명 오너 셰프의 레스토랑, 듣도 보도 못한 색다른 칵테일을 조제하는 라운지 바, 글루텐과 합성물을 쓰지 않는 디저트 카페까지 내로라하는 맛집은 거의 다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내 운신의 폭은 좁아질 터였다. 하지만 설령 이 레스토랑 한군데만 올 수 있다 한들 그녀와 함께라면 늘 새로울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젤라토를 녹이고 있던 눈을 들어 보니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염원을 담은 담백한 말투로 물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같이요.”
  그녀는 웃지도 않고 여전히 탐색하듯 커다란 눈으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볼이 홍조를 띠고 있는 건 착각일까.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녀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게 오히려 나를 조금 불안하게 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공수표를 남발하는 데 개의치 않는 게 아닐까? 그때 차 한 대가 레스토랑 건너 길에 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거기서 내린 건 지미였다.

  “저도 잠시 실례할게요.”
  놀라운 타이밍으로 이번에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유로운 척 앉아 있다가 그녀가 화장실 복도로 사라지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활짝 열어둔 아코디언 도어 쪽 자리라 굳이 현관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곧장 밖으로 나가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늦었잖아.”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지미가 고개를 들었다. 지미는 변명도 생략하고 곧장 물었다.
  “수지 큐랑 왔니?”
  “그럴 리 없잖아. 돈은?”
  지미는 지갑에서 100달러 두 장을 꺼내며 또 물었다.
  “그럼 누구?”
  “알 거 없잖아. 얼른 가 버려.”
  나는 그중 하나만 취하며 말했다. 지미는 아랑곳없이 내 어깨너머를 기웃거렸다. 나는 지미를 강제로 돌려세우고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못내 아쉬운 듯 뒷걸음질 치는 지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그녀가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나를 찾는 듯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베니토가 그녀에게 다가가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지미가 중얼거린 한마디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클레어?”
  지미의 읊조림은 정확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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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잔액에서 막 웃었어요... 김작가님 글에서 이런 요소가 나오리라고는 ^^

식은땀 나는 상황이죠ㅋㅋ

저는 롯데백화점에서 신발 사다가 경험을 해봐서~ 충분히 ^^

이런 매너있는 웨이터가 외국에는 진짜 있나요??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외국에도 저 정도 센스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한국에도 아예 없진 않을걸요.

흑 모두 다 지미를 좋아했던건가요?

어쩌면 릭...?

제가 웨이터였으면 큰소리로 이야기 했을텐데.. 아쉽.. 아 상상만 해도 즐겁군요.

악마를 보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 지른 후의 상황을 생각 못했군요..

아이리스 짤을 들고 오셨어야... ㅋㅋ

저는 지금 수지큐가 생각이 납니다. 두사람의 꽁냥꽁냥이 좋다가 갑자기 수지큐의 마음이 제 마음에 들어오네요. 나는 이 연애 반댈세

저도 이쪽에 줄을 서 보겠습니다.

잊고 있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어쩌니 잭.

내가 맘에 들어하는 여자들은
내 친구 여자친구 이거나
우리형 애인 형 친구 애인,
아니면 꼭 동성동본

하나를 택하라면 동성동본으로 하겠습니다.

전편에서 웨이터가 싫어졌다가 갑자기 웨이터가 좋아질려다가... 끝에 지미.....
역시 김작가님은 밀당의 고수...

베니토만한 웨이터 없습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모두 연결되어 있네요
잭은 지미같아요
지미는 잭같고요
치료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아...뭔가 지금 막 머릿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해요
딱 한 조각 퍼즐만 있으면 풀릴 것 같은데...
하..뭐지 뭐지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폰을 꺼야 겠어요
다른 글을 봐도 지미의 마지막 읊조림이 울려서 집중이 안 되네요 다시 와서 또 계속 보고 있...;;

그래도 다행히 꽁냥질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전편에서 그녀의 직업 이야기 나왔을 때 혹시 했는데 역시!

이렇게 좋은 곳을 함께 오지 못한 게 아쉽고 미안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잭. 작업 중이었잖아요. 왜 수지 큐 생각을 하는거예요? 치.... 그리곤 또 하던 작업 계속하고~~~~!!!
외국영화 자막을 읽는 느낌이예요. 인물들이 영화에서나 봤던 이름 모를 배우 얼굴들이 스치네요. 재밌어요. 글을 읽는데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요.
지미를 왜 끌어들이나 했는데...클레어랑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네요. 궁금궁금궁금

미안하면서도 하던 일은 계속해야겠고... 인간아

수지 큐에 이어서 클레어까지?
형제끼리 너무.. 이러면 안되잖아욥..

형이 너무 사기캐... ㅠㅠ

오마이갓! 운명의 장난인가...!

작가의 장난입니다ㅋㅋ

미워미워! 힝~

역시 이래서 잔액부족을 만들었군용! 지미를 오게 하려구요 😱

인터넷 뱅킹이 안 되면 스팀페이를 이용하면 될텐데 아쉽네요.

액티브 키를 놓고 왔...

구멍난 양말을 신었는데 그 날 따라 신발을 벗고 들어 가야했을 때,, 그때의 당혹스러움이 생각납니다.ㅋㅋ 웃픈. 잭의 당혹스러움,, 응원하고 싶어지네요ㅎ

현실 세상에선 대부분 "잔액이 부족 한데요"라고 말을 하죠.ㅋㅋ
마지막에.. 지미가 클레어를 알고 있는!! 헐~~

센스있는 웨이터.. 현실에서도 만나보고 싶네요. 근데, '얼른 가 버려' 가 뭔가 다급하면서도 웃기네요 ㅋㅋ

으악 또 지미가...
요 다음 부터 제가 상상하는 상태라면 그림자 같은 삶이군요 ㅎㅎ;

맙소사..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첫데이트에 남자가 사려다가 카드잔액이 없으면;;;; 제가 그 순간이라면 손발에 땀이;;;;;;;
웨이터는 진심 센스쟁이!!
웨이터에게 한턱 쏴야겠네요 ㅋ

하필 카드 잔액이 모자라서 결국 지미가 오고
불길한 예감은 틀림이 없는것 같아요
잭이 또 실망하고 좌절 할까봐 걱정이네요 ^^

젤라또는 이천쌀이 최고라고 말하려 했는데...지미......럴쑤 럴쑤 이럴쑤!

쑤님은 저 밑에 계신데...

미와 럴을 이으면 제 드립이 완성됩니다.

제가 그걸 차마 말할 수 없어서...

클레어라는 마지막 단어에 녹아 있는 스릴 있는 많은 사건이 기대됩니다
위기를 모면하는 그 방법은 일상에서 써먹을 수 있겠네요
주말 화창합니다 지미와 베르토 덕분인 것처럼 샘

무언가 지미를 거쳐간(?) 여자를 잭이 만나게 되는 식인가요? 무언가 그렇게 되도록 치료를 한 걸까요? 치료를 위해 지미의 무언갈 이식했는데 그 속에 여성편력이랄까 지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페로몬 같은 거랄까가 같이 이식 된 건... 아... 무슨 망상인지... M이라는 드라마가 떠오른 건 무어죠 ㅋㅋ; 수지큐에게로 돌아갈꺼 같기도...

소설이 너무도 일상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네요^^
얼마나 식은땀이 났을까, 까칠한 잭께서 ㅋㅋ

아... 지미가 클레어를 아네요....

설마 클레어랑 지미랑...? 이것이 바로 형제의 난인가요....

[끽연실] 트위터

<나의 아저씨> 최종화를 보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씬을 만났다.

그 드라마 볼까말까 망설이는데ㅜ 봐야겠군요

뗨뗨 봤는데 나쁘진 않더라구요. 주연 배우들 연기도 좋고 특히 주제가가... ㅠㅠb

무슨 씬인지 궁금하네요.
전 할무니보면서 주륵주륵주르륵.허엉허엉 울었네요. 행복하자가 결국 하고픈 말인가봐요.

ㅠㅠ 아 이장면이요! 진짜 먹먹했어요 ㅠㅠ

그쵸 ㅠㅠ

아픈 와중에도 이것들 연애질 보러왔는뎅 ㅜㅜ 없네여

북키퍼님 몸조리하시라고 주말 동안은 사라져 준다네요.

오늘 안 오나요 이것들(?)이라 불린 그 분들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요

베니토의 베려심 정말 멋진데요...
설마 지미의 전 애인은 아니겠죠??

지미의 전 애인이 베니토...

제가 정말 띄엄띄엄 읽었나봐요 ㅋㅋ 내용이 ㅠ
언제 이어서 읽어야 겠어요 ㅠ

앜ㅋㅋ 농담입니다.

ㅠㅠ저 속은건가요? ㅋㅋㅋㅋ

에구
못 읽었던 편 부터 읽고 다시 올게요

클레어가 신경과학을 한다는 말이 떠올려 지네요.
잭 ㅠㅠㅠㅠ
지미가 혹시 클레어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요?

여러모로 불러 보게 됩니다.
짹! ㅠㅠ

다 읽고 왔어요
다 읽었어요

운명적인 만남,,,,,

그런데 지미랑 아는 사인가 봐요
아니면 지미가 클레어를 좋아하는 상황이든지,,,,, 다음편을 기대할게요

한국에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읽을 거리가 넘치는 스팀잇인데 이렇게 찾아서 읽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한국 생활은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습니다. 날씨가 계속 눅눅하네요. 여름에는 어떻게 버틸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1편부터 쭉 읽던 소설이구
님은 제가 스팀잇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알게된 분이라 그런지 더 맘이 가요

한국의 여름,,,,,동남아 더위에 가까워요

영국에 오래 살다 몇 해 전
영어교육평가원에 와 있는
친한 친구는 그래도 잘 적응하며 지내더라구요

컨디션 조절 잘 하셔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쌤도 건강 관리 잘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네~~

서로 그래보아요 ㅎㅎ

이런 센스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평생 기억될 일이죠.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해야 겠어요. 근데...끝이 꼬이는군요....불쌍한,,,또 흔들리면 어쩌죠?

과제랑 시험에 치이다보니 스팀잇을 다시 찾기까지 거의 한달이 걸렸네요 ㅋㅋㅋ..ㅠㅠ 바로 작가님 소설 다시 읽으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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