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한가운데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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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한가운데




 난 고무 타는 냄새에 잠에서 깨어났다. 본가에서 독립한 지 몇 달 안되는 날의 새벽이었다. 복층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방 안은 이미 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꿈속에서 들은 것 같았다. 연달아 나오는 기침에 정신이 확 들었고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음을 알고 황급히 옷을 꿰어 입었다.

 비상구 문을 열고 펼쳐진 계단을 마주했다. 심장이 고동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용돌이 같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다리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날뛰는 몸과는 달리 의식은 매캐한 연기 속을 부유하며 한때 움켜쥐었다고 믿었던, 그러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소중한 순간들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는 푸른색 물질이었다. 바람과 거품을 내뿜으며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끝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생명체. 바다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태종대 자갈마당에서 엄마 품에 안겨 비릿한 냄새를 맡던 두 살 배기 아기는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고 잠긴 대문 밑으로 빠져나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경찰서에서 발견되곤 했다. 조금 더 자라서 학생이 된 아기는 친구와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건즈 앤 로지스의 뮤직비디오를 자주 틀어주던 라이브라는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독서실에서 밤을 새운 후 새벽에 낙엽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던 시간으로 점프했고, 지상의 양식을 읽은 후 뛰쳐나가 소나기를 맞고 옷이 다 젖었던 순간, 첫 강아지가 집에 왔을 때 털을 쓰다듬는 순간에 도착하고 있었다. 동시에 입 안에는 연인과 시드니 락스에서 사먹었던 케밥의 맛이 감돌았다.

 13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살아온 생을 빠른 시간에 복기했다는 것을 알았다. 크게 웃었건, 크게 울었건 그 어느것 하나 달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후 불이 났던 순간을 회상할 때마다 죽기 전에 우위를 다투며 떠올랐던 기억 중에서 그 해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읽고 있었던 니체 전집이나 몰입해서 보았던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가 없다는 점을 알았다. 어쩌면 시간의 정체는 낭만이라는 징검다리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오피스텔 입구에는 안전모를 벗은 소방수들이 경비 아저씨와 얘기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경비 아저씨는 왜 내려왔는지 물으며 화재는 이미 진압이 되었으니 엘리베이터를 타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





 그로부터 6년이 흐른 후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커피가게를 열었다. 그 시절 지금은 폐간된, 크래커라는 스트리트 패션 잡지를 구독했다. 어느날 오픈 준비를 마치고 크래커 잡지를 뒤적이다가 한 여자아이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잡지 속의 그 아이는 뺨이 붉지 않았다면 암 투병 환자라고 착각할 만큼 짧은 머리를 하고 페이즐리 무늬의 보라색 빈티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잡지 속의 그 아이가 가게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나는 불에 덴 것처럼 놀랐다.

 정묘일주. 눈빛은 차갑고 심장이 뜨거운 아이. 그녀는 감자를 좋아한다며 자신을 수 포타토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태어나서 그녀만큼 옷을 잘 입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분명히 전형적인 미녀가 아니었으나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과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에게 반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에서 보낸 많은 시간을 그녀의 문신에 대해서 욕하는 어르신들과 싸우고 늘 작은 송곳을 휴대하며 카페나 주점의 여자화장실에 매립해놓은 몰래카메라를 찾아내어 박살내는데 쓰곤 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는 바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에게 젊은 시절에 겪었던 화재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 포타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 때 N 오피스텔의 화재는 바로 자기집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녀는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가 새벽에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잠들었다는 것이었다. 계산해보니 그때 회사원이었던 나와 고등학생이었던 수는 같은 건물에 5년이나 살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회사를 그만둔 후 커피가게를 열고 수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한 후 우연히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우리는 무척 흥분했고 더욱 친밀해졌다. 난 마치 전생의 인연을 만난것처럼 낭만적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다시 N 오피스텔의 13층 비상계단에 서 있다. 이제 이 소용돌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삶의 거대한 영사기를 돌릴 것이다. 나는 분명히 불이 났을 때 너무 늦게 일어났다. 그 대신 너무 빨리 깨달았다. 일어나는 모든 순간이 낭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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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오치님 항상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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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보면 늘 하루하루가 낭만일 듯한
상상에 빠지게 되네요^^

3년 뒤에 오늘을 본다면 어떨까요
낭만 가득한 하루되세요 ^^

삶에 존재하는 모든 낭만이 소설일지 실제일지모를 이 글 안에 다 담겨있는 것 같아요. (엄지척)

어느것을 확대해서 보느냐에 따라 삶에서의 쟝르가 바뀌는 기분이 들곤 하죠 ^^

항상 글을 보면 소설인듯 현실인듯 오묘한 경계가 보이네요

현실도 재구성해보면 소설 몇 편은 나오네요 ^^

인연이란 참 오묘하네요.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더더욱이요. ㅎㅎㅎ

맞아요 인연은 참 이상하죠^^

기막힌 인연에 관한 이야기네요.
스쳐지나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낭만 가득한 마음으로 임해야겠어요.^^

gghite님 포스팅으로 엿보는 일상은 낭만이 넘치는데요:-)

보얀님 글을 꿈결에 읽는 것만 같아 너무 좋아요.

리리님 진짜 지나고 보니 꿈을 꾼 것 같기도 해요.
내년에 수 포타토 결혼식에 들러리를 하게되어 런던에 초대받았답니다:)

너무 묘해서 오히려 일상과 별반 다를거 없어보이는 인연이네요. 분명 운명적인 끌림같은게 있었을거 같아요.

우연인지 운명이지 알 수 없지만 인연을 소중하게 대하려고해요.:)

정말 소설같은...

써 놓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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