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15]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자조적 심상 재구성(Self-Help Imagery Rescripting)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거짓 기억(false memory)을 연구하는 영국의 법정 심리학자 줄리아 쇼의 책 중 The Memory Illusion이 몹쓸 기억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을 여러가지 프레임을 통해 분류해 볼 수 있는데 과거 기억은 개인사가 접목돼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의미기억(semantic memory)과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으로 나뉩니다. 의미기억은 이를 테면 서울올림픽이 몇년도에 열렸냐는 것이며 자서전적 기억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내가 어디서 살고 있었다는 개인적 일화와 관련이 됩니다. 이 중 자서전적 기억은 약간 과장하면 fact가 10 덧붙인 해석이나 이야기가 90인 가공물에 가깝습니다. 줄리아 쇼의 책을 조만간 읽어볼 것인데 그녀가 몹쓸 기억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덧대고 덧대 원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자서전적 기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의 자서전적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의 권위자는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F. Loftus)입니다. 그녀의 테드 강연이 올라와 있고 친절하게 한글 자막까지 올라와 있으니 약간 관심은 있으나 영상을 다 볼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자막이라도 한 번 훑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테드 강연에서 그녀가 강연 말미에 언급하고 있기도 하지만, 기억이 fact라기보다 사후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구성된 이야기가 개인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경우가 많죠. 누군가는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한 로맨시스트로 자기 삶의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원할 것이고 어떤 이는 평생 과학 탐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사람으로 무덤 비석에 새겨지길 원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게 fact와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그 이야기가 fact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실상 1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그런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죠. 이 말은 심리치료적인 함의를 갖습니다.

심리치료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서전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기억 재구성 작업을 통해 한 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부정적으로 편향된 자서전적 기억을 지녔고 그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나를 심적으로 괴롭히는 경우 그렇죠. 예를 들어, 자동차 사고로 부인과 자식을 잃은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자동차를 볼 때마다 그 날의 재앙이 현실처럼 재상영되고, 꿈에서도 더 극단적인 형태로 생생하게 사고의 악몽이 펼쳐지니 이 사람 입장에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이런 PTSD의 재경험 증상들은 나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더욱 강렬해집니다. 자신의 사소한 실수들이 기억 속에서 돋보기를 들이대듯 커다랗게 확대되고(부정적 편향), 이로 인한 죄책감에 자살시도를 여러 번 합니다. 이 사람에게 심리치료자들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여러가지 방식의 치료가 잘 발달돼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최신 기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일전에 제가 포스팅한 바 있는 심상 재구성(imagery rescripting)입니다. 심상 재구성은 일련의 구조화되고 안전한 틀 안에서 기억을 고쳐쓰는 과정입니다. 자서전적인 기억을 심상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죠. 심상 재구성은 PTSD 치료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강박증, 섭식장애, 성격장애, 사회불안장애, 주요우울장애, 공황장애 등 다양한 장애들에 활용되고 있고, 치료효과가 반복검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심상 재구성은 주로 치료자와 면대면으로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개했던 심상 재구성도 그렇고요. 오늘 간략히 소개할 따끈따근한 최신 논문은 자조(self-help) 방식의 심상 재구성이 우울증으로 진단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1 기대했던 효과가 나왔으니 저널에 실렸겠죠. 이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저자들이 심상 재구성을 사용한 방식입니다. Arntz와 Weertman 3단계 방식을 따르지 않고 메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대해 고정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내담자들과 작업할 때 그들의 관점을 전환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림이나 이야기(예, 동화)나 필름을 사용하는 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인생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표현해 주고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심상을 활용한 인지치료, 240-41쪽.

초보 상담자가 교과서적으로 인지행동치료를 시행하면 내담자가 도망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담에 더는 안 온다는 것이죠.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신념은 다른 사람 눈에 그것이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나름의 '타당한 역사'를 갖게 마련입니다. 이런 타당한 역사를 초보 상담자가 어설프게 반박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얼굴에 화가 많아 보이십니다'라고 운을 떼는 사이비 신도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념에 변화를 야기시키려다가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죠.

초보 상담자뿐만 아니라 보다 능숙한 상담자라 하더라도 인지행동치료적인 언어 기법(예, 소크라테스식 질문)들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대안은 메타포의 활용입니다. 메타포를 통해 핵심을 비껴가지 않으면서도 보다 완곡하게 치료자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지행동치료의 제3물결로 지칭되는 수용전념치료(ACT)는 비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비유 역시 메타포의 일종이라 할 수 있겠죠.

이 논문에서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심상 재구성하는 데 있어 메타포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시를 한 번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이미지 2.png

Adapted from Moritz et al. Behav Res Ther 2018;104:74-83.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자서전적 기억으로 돌아가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된 자신을 상상합니다. 혹은 괴롭히던 아이들이 난장이 똥자루가 된 상황을 상상하거나 괴롭히던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이런 상상을 통해 부정적인 자서전적 기억을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재구성합니다. 미래 사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을 적용 가능합니다. 발표불안이 심한 경우 미래 발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볼 수 있겠죠. 발표 잘하는 사람하니까 법륜스님이 떠오르네요. 저 같은 경우라면 자신이 '마치' 법륜스님이 된 것처럼 상상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Adapted from Moritz et al. Behav Res Ther 2018;104:74-83.

현재 심한 우울을 지닌 경우에는 처음에 이 우울을 둥지에서 땅으로 추락한 작은 새로 시각화해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마음 속에서 이 새를 점점 아름답고 멋진 새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심상 속에서 이런 메타포를 활용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재구성하는 것은 특히 사고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돕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합니다.

부정적인 사건이나 감정 등을 메타포 이미지를 통해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심상 재구성 과정은(저자들은 benign therapeutic manipulation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사건이나 감정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을 보다 기능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Brewin이라는 학자는 어떤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긍정적인 이미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하여 역기능이 초래되고 있는 경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삽입하여 반복적으로 재생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2

사실 심상 재구성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치료효과를 내고 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2000년 들어와서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과거에 발생했던 어떤 일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일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개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상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해석이라든지 의미를 보다 온건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증상을 가라앉히는 것이 가능함이 반복적으로 밝혀지고 있다면 일단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자서전적 기억이 일종의 이야기고 심상 재구성 과정을 통해 이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하는 것이 치료 목표인데, 이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side effect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주의를 요하는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심상 재구성 과정에서 가해자들의 공격성이 지나치게 과장됨으로써 심상 재구성의 의도와는 다르게 기억의 일부는 부정적인 편향이 더 심해질 수 있겠죠.

이 논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What matters in life is not what happens to you but what you remember and how you remember it. - Gabriel García Márquez, 2002

보통 사회심리학 논문들이 이렇게 서두를 여는데 간지나죠. 저도 언젠가 제가 인상 깊게 봤던 작가의 글을 이런 식으로 논문 서두에 인용해 보고 싶어지네요.

ref)

  1. Moritz, S., Ahlf-Schumacher, J., Hottenrott, B., Peter, U., Franck, S., Schnell, T., ... & Jelinek, L. (2018). We cannot change the past, but we can change its meaning.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on the effects of self-help imagery rescripting on depression.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104, 74-83.
  2. Brewin, C. R. (2006). Understanding cognitive behaviour therapy: A retrieval competition account. Behaviour research and therapy, 44(6), 765-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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