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10 나루 작업 일지] 내 작곡 노트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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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곡을 쓸 때 피아노 없이 하려 합니다. 피아노로 곡을 쓸 때 나오는 몇 가지 단점이 있는데요. 가장 큰 단점은 손에 익숙한 패턴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 즐겨 연주하는 코드 진행이나 습관적인 멜로디, 자주 잡는 코드 모양(Voicing)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에 곡의 독자성이 사라져요. 또 지극히 피아노다운 멜로디가 나오는 것도 단점입니다. 피아노에서 연주하던 멜로디를 다른 악기로 옮겼을 때,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점만 있는 건 아니고, 장점도 있습니다. 오늘 제게 이 장점이 꼭 필요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곡을 빨리 쓸 수 있다.

피아노를 치면서 곡을 쓰면 곡을 무척 빨리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안에도 곡 하나를 금방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다만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게 문제지요.

오늘은 시간에 쫓기는 관계로 관습적인 멜로디와 손에 익은 코드 진행의 덕을 좀 보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마음에 드는 곡이(연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곡을 보낼 수도 없어 답답할 때쯤, 오랜만에 챙겨온 노트에 눈이 갑니다.

요즘은 악보를 그려야 할 때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A3 사이즈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음악 노트를 쓴 지도 꽤 오래됐어요. 오늘 가져온 노트는 2013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서 샀던, 저의 작곡 노트입니다.



2013년부터 썼던 곡들을 기록한 노트에요. 이 노트에는 집중해서 썼던 곡보다는 손버릇처럼 나온 곡, 금방 써진 곡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버리긴 아깝고, 어디에 쓸 수는 없는 곡들을 정리해둔 노트에요. 마음이 급해져 예전에 썼던 곡들을 하나씩 쳐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급하게 곡이 필요할 때 이 노트에서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어딘가 뻔하게 느껴지지만, 가끔은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거든요. 또 쓸 때는 별로였는데, 다시 보니 좋은 경우도 몇 번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해 첫 장부터 하나하나 살펴봤습니다. 몇 개는 이미 차출돼 발표된 것도 있고, 언제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곡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곡 중에 한 곡 정도 제가 쓰려는 곡과 비슷한 게 있었어요. 그래도 몇 년 전에 썼던 곡을 쓰는 게 마음에 걸려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곡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에 썼던 곡들을 다시 돌아보니, 지난 5년간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았어요. 오히려 그때 썼던 곡들이 더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시에는 버리기 아까워 그려놓았던 건데 노트를 넘기다 보니, 언제라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어떻게든 곡을 쓰려 애썼던 5년 전 제 모습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요즘은 일이 아니면, 곡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 됐건 어디서든 매일 곡을 쓰라던, 스승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흔한 멜로디라도, 뻔한 코드 진행이라도 매일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혹은 어느 장소에서는 좋은 곡이 되겠지요?

다행히도 곡은 새로 만들었고,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살을 붙여가면서 그냥저냥 봐줄 만한 곡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종일 작업만 했는데요. 저는 이상하게도 저를 괴롭히며 몰아서 하는 작업이 참 좋습니다. 머리는 깨질 것 같지만, 기분은 무척 상쾌하네요.

이제 좀 쉬고, 내일부터는 반쯤 남은 이 노트를 다시 채워가려고요.



이 노트를 보면서 쏠메(@kyslmate)님이 글 아래 덧붙이시는 문구가 생각났습니다.

영감이란, 매일 일하는 것이다. -사를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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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작곡을 하신다니 두 명의 뮤지션이 떠오르네요. 유재하, 유희열.
머리속으로는 그려지는데 손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이 있고, 손으로는 그려지는데 머리는 만족하지 못하는 게 있나봐요. 마음으로 그려야 하는데 그게 제일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정말 좋은 댓글이에요. 머리와 손이 아닌 마음으로. 이건 정말 오래오래 기억 해야겠습니다. 무언가 마음을 다해 한다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손으로, 머리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도 같습니다.

천천히 마음으로 그려볼게요.

좋은 글입니다~ 궁금한데 애플의 가라지 밴드 어플로는 작곡이 어떠신지요?? 궁금합니다~!^^

가라지 밴드는 오래전에 한 번 써봤는데, 앱을 깔고 몇 번 만져본 게 전부라 어땠다고 말씀드릴 정도가 못됩니다. ㅠㅠ 주위에 가라지 밴드로 곡을 쓰는 분도 많이 계시더라고요.

수고하셨습니다.

남은 절반에 좋은 곡과함께 좋은 추억도 같이 쌓여가길 바랍니다.

저는 예전에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면서 뭔가 생각날 때마다 끄적이곤 했는데 가끔 꺼내보면 창피하기도 하고 놀랍기도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맞아요. 그 노트를 보면서, 그 곡을 썼던 장소나 그 시기가 함께 떠오르더라고요. 말씀대로 습작 안에 추억도 함께 쌓이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노트를 꽉 채웠다는작업 일지를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소요님의 스케치북도 궁금합니다. 그 안의 그림들도 한 번씩 올려주시면 즐겁게 볼 텐데요.

요즘은 디지털로 그려서 스케치북을 잘 안쓰게 되네요.
전에 그린 것도 있고 아이패드에 그린 것도 있지만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라서요.
꼭 어릴 때 쓴 일기장 같아서 꺼내보면 웃음만 나옵니다. 그리고 웃음도 나옵니다.

나중에 아이패드의 용량이 꽉찼다는 작업일지를 올려보겠습니다.

엊그제 지하철에서 오선지에 작곡하는 한 친구를 봤었는데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ㅎㅎ

그러셨군요! 작곡일 수도 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곡을 쓰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요할 것 같은 느낌이 ㅎㅎ

예전에 합주가 있을 때, 시간에 쫓겨 얼른 악보를 만들어야 할 때, 지하철에서 악보를 그리곤 했었어요. 문득 그때가 떠오르네요. ㅎㅎ

좋은 글이네요. 혹시 곡쓰는 법 올려주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코드 진행 방법이라든지.. 저처럼 문외한한테는 좋은 컨텐츠가 될것 같습니다.
: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언제나 계획은 있지만 귀차니즘 때문에... 특히나 코드 진행과 같은, 화성학과 관련 있는 내용은 어떻게 쉽게 풀어야 할 지가 제게는 참 어렵더라고요. ㅠㅠ

@devils님께서 화성학 이론을 정리해주신 게 있어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ioioioioi님도 '초보도 쉽게 할 수 있다!! 작곡!!'을 연재 중이십니다:)

음..그렇군요. 역시 어려울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ㅎㅎ
정보 감사합니다.
: )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쉽게 풀어낼 자신이 없어서요! 그래도 기억해뒀다가 언제라도 용기가 난다면 시도해볼게요+_+

저도 소울메이트님 글 볼 때마다ㅋㅋ 젤 아래 문구 보며 열심히 한 날은 뿌듯하고, 아무것도 안 한 날은 뜨끔합니다ㅎㅎ

ㅋㅋㅋㅋ 경아님도 저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시는군요. 저도 어제는 뿌듯한 마음으로 쏠메님이 덧붙이시는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

저도 예전부터 이것저것 생각의 단편을 기록한 노트가 있습니다. 그 노트의 내용은 새로운 생각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살이 붙어 한 편의 글이 되기도 합니다. 노트의 멜로디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어떻게든 새 곡을 지어낸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샤르트르의 금언을 실천하셨군요!^^

생각의 단편을 기록한 노트

노트 이름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예뻐요.

미리 만들어둔 곡만큼은 정말 쓰고 싶지 않더라고요. 궁즉통이라고, 급하니 그래도 뭐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앞으로도 저 문구를 새기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습관처럼 매일 작업하는 삶.. 저는 이거 안되더라구요. 선천적으로 게으르고 또 뭐가 이렇게 할일없이 바쁜지..ㅎㅎ 예컨대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피아노 칠 일을 많이 만들어놓습니다. 마감기한이 있는 일을 계속 만들면 어쩔수 없이.하게 되더라구요 ㅎㅎ

저도 오쟁님의 스타일에 좀 더 가깝습니다. 무척 게으른 사람이라 의무가 되지 않으면 쉽게 움직여지지 않더라고요. 저도 일을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편이었는데, 벌이는 일을 수습하다 지쳐 널브러져 있습니다. 오쟁님의 멈추지 않는 에너지가 참 멋있어요. 미니스트릿도 응원합니다.

작곡노트, 멋져요!

방치돼있는 노트였는데, 다시 이어서 쓰고 있어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루틴하게 습관을 만드는게 저는 너무 어렵더라고요-ㅠ 창작하시는 일을 하루하루 쌓아가시려고 한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요-리스펙트!🙏

저도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려고 이 글을 썼어요. 봄봄님이 리스펙을 보내 주셨으니! 그 힘을 받아 정말로, 하루하루 잘 쌓아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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