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번호 일기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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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번호일기를 쓰게 될까? 요즘은 토막생각밖에 할 수 없다. 퇴고는 고사하고, 글을 매일 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하루는 빼곡히 차 있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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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때 다 버리고 유일하게 챙겨온 냄비를 애들이 청소하는 데 써버렸다. 라면조차 끓여 먹을 수 없어 오랜만에 컵라면을 사 왔다. 저번 달에 우연히 먹었던 까르보 불닭이 생각나 집을 나섰는데, 대형마트를 가도 찾을 수가 없어 그냥 육개장을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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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온 집 근처는 음식점이 많지 않다. 저녁 늦게 혼자 먹을만한, 포장해올 만한 음식을 파는 곳이 없다. 맥도날드도 멀리 있다. 이번 집에서는 절대 요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강제로 요리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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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9시에 인터넷 기사님이 오셨다. 인터넷 선을 바깥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비가 와 작업이 불가하다 하셨다. 다음 주로 방문 일정을 다시 잡았다. 핫스팟으로 며칠을 더 연명해야 한다. 내가 더 아쉬웠을까? 기사님이 더 아쉬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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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올 아이들을 생각하며 어제 합주 끝나고 유명한 빵집에 가 오늘 먹을 간식을 샀다. 활동비 명목의 공금도 준비해두고, 미안한 마음에 선물까지 포장해두고 아이들을 맞았다. 다 같이 이른 점심을 먹은 후에는, 버릴 것과 남겨둘 것만 겨우 설명해주고 집을 나서야 했다.

일 끝나고 집에 들어와선 또 눈물이 날 뻔... (요즘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집이 깨끗해진 건 물론이고, 이사 때 버리기 애매해 들고 온 것과 자신들이 바깥에서 사 온 소품을 이용해 내 방을 꾸며주었다. 이부자리까지 펴둔 건 물론이고, 요즘 바닥에서 자는 내게 입주 선물로 매트까지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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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이 너무 많이 밀려 공연이 끝나고는 레슨을 해야 했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애들의 마음도, 내 마음도 해이해져 수다만 잔뜩 떨고 왔다. 그중 한 명은 아이돌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제 스무 살이 된다는 사실이 많이 불안한 것 같다. 몇 주 째 힘들어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다다음 주엔 우리 집 근처에서 맛있는 밥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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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영화를 전공했던 또 다른 학생이 부산 국제 영화제를 보러 간다길래, 시간을 맞춰 잠깐이라도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매주 보는 사이지만, 낯선 곳에서 보면 그 반가움이 배가 된다. 아직 티켓이 남아 있다면 영화를 한 편 보고, 그 학생을 만나는 게 내 유일한 부산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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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유명한' 오빠가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에게 당분간 조용히 있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연락하기 조심스럽다는 말에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와 '적당히 유명한' 오빠를 오가며 부산 일정을 조율하게 되었다.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는 "저는 잘 모르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때가 있잖아요."라며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을 여러 번 꺼냈다. '예술하는' 사람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산에서 혼자 있을 핑곗거리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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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 번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와 통화하며 도착 시각, 도착 장소, 묵을 장소 등을 정했다. 오빠는 대화 내내 '모시러 가야죠.' '제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했다. 띠동갑도 넉넉하게 넘는 애송이인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모시고 다닌다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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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유명한' 오빠의 조용히 있고 싶다는, 혼자 있고 싶다는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오늘은 늦게 자더라도 그 오빠의 곡을 피아노 연주로 녹음할 생각이다.

너무 피곤해 맥주를 벌컥 들이켜고 싶지만, 내일은 새벽에 나가야 하고, 내일 저녁엔 당연히 술을 마실 테니 몸을 아껴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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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지방에 먼저 들려야 하는데, 지방에 들렀다 다시 부산에 가는 건 너무 피곤할 것 같아 마지막까지 일정 변경을 고민했다. 내일 가지 않으면 부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려야 해 힘들어도 내일 가기로 했다. 새벽 6시 차를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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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챙기기'가 내 주전공인데, 정신이 없어 정작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의 선물을 챙기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웬만한 가게도 문을 닫아 무척 난감했다.

고민 끝에 내일 지방에 내려가는 김에 나도 맛보지 못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지역의 특산품을 사기로 했다. 재밌는 선물이 될 것 같다. 내일 바쁜 일정을 쪼개 선물 살 시간을 비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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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강원도로 공연을 하러 간다. 매년 가을 산속에서 열리는 공연이 있다. 이틀간 공연을 하는데, 머무는 동안 숙식이 제공돼 여행의 마음으로 가곤 한다. 몇 년 전 처음 섭외가 왔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혼자 가려 궁리했는데, 이번엔 함께 공연하는 사람과 그들의 지인, 거기에 다음 작업을 같이하기로 한 사람들까지, 무려 12명의 인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주최 측에선 숙소 두 채를 내어주었고,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더 가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지 고민중이다. 뜻하지 않게 한 주에 여행을 두 번이나 가게 됐다.

그다음 주엔 큰 공연 두 개가 있고, 그다음 주엔 제주도에 가야 한다. 그러면 11월이 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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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축하드립니다.ㅎ
'적당히 유명한' 오빠는 충전이 필요한 걸까요.
번호 일기도 좋습니다.^^

산속에서의 공연이라 너무 멋지네요.
가을이 되고 정말 바쁘신거 같아요 나루님^^

정말 바쁜일정이네요
건강잘챙기시궁 감기도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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