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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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에 서울로 돌아왔는데,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또 강원도에 있어야 한다. 일주일 치 일정을 이틀 만에 소화하려니 죽을 것 같다. 다음 주까지는 조금의 틈도 없이 일이 꽉 차 있다.

떠나기 전에 처리할 작업이 많아서 어제는 꽤 늦게 잤다. 작업이 남아 있어 아침 일찍 알람을 맞췄는데, 대개 알람을 맞춘 날은 알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난다. 마음이 불안해서일까? 너무 이른 아침에 할 건 없고, 어제 쓰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엄두를 못 냈던 글을 짧게 써본다.


어제는 늦게까지 자려고 했는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면 깊이 잘 수 없다. 평소보다 일찍, 개운한 몸으로 일어나 열심히 일했다. 지금이 음악인들에겐 극성수기인데, 그래서인지 작업 의뢰가 꽤 많이 들어왔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작업의 페이란 터무니없이 저렴하거나, 터무니없이 비싸곤 하다.

이번 가을, 내게 가격을 먼저 묻는 작업이 꽤 많이 들어왔다. 아직 배가 부른 것인지는 몰라도 내용을 먼저 듣고 하고 싶으면 적당하게, 하기 싫으면 엄청나게 비싸게 가격을 불렀다. 하기 싫은 일을 바쁜 시간을 쪼개 하니까 돈이라도 많이 받아야겠다는 심산이었다.

대개 그런 작업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몇 개는 진행되기도 했다. 작업이 성사될 때, 묘한 쾌감과 불쾌감이 함께했다. 그래도 작업 많이 해서 이번 가을 버틸 수 있었다.


어제는 여유 있는 낮을 보내는 게 목표였는데, 일전에 공연장에서 만난 피아노 치는 동생과의 약속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내일 만나냐는 문자가 와있었다. 원래 일정을 잡고 싶었는데, 사람들 시간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비워둔 시간이었다. 그때 일정이 있었으면 어땠을지... 식은땀이 났다.


함께 작업할 당시에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작업이 끝나고 군대까지 다녀온 후. 동생은 한 번씩 나의 공연 소식을 듣고 찾아와주곤 했다. 그것이 마음의 짐으로, 또 고마움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런 마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을 꺼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약속을 잡았을 것이다.

나랑 작업할 땐 매번 늦었는데, 10분이나 일찍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에 감동했다. 동생은 몇 년 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삶에 질서가 느껴진달까? 음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동생도 아마 그런 걸 느꼈겠지.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 간 동네 라멘집에 줄을 서 라멘을 먹었다. 그리고 소화시킬 겸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그리곤 커피 맛이 괜찮은 카페에 가서 커피 두 잔과 스콘 세 개를 시켰다.


내 주변에 적게 잡아도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백 명은 넘을 것 같은데, 그 백 명이 모두 나보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사실은 내게 비극일까 희극일까.


작년까지만 해도 인스타그램을 꾸준히 했다. 당시 동생은 자신이 연주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자주 올렸다. 키스 자렛, 빌 에반스, 아트 테이텀, 버드 파웰...

아직도 그런 피아니스트를 좋아하냐 물으니 요즘은 아론 팍스나 토드 구스타브센을 많이 연구한다고 했다. 한참 여러 피아니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상을 함께 봤다. 그런 시간이 정말 소중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대화를 하고 싶어 하니까... 동생은 우리가 '덕업일치'라며 웃었다.


정작 작업을 같이할 때는 바이올린 연주를 했기 때문에 동생이 어떤 곡을 쓰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나올 곡을 미리 들어보고 싶었는데, 음원은 없다길래 데모들을 쭉 들었다. 다음에 작업할 곡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악기 구성을 몇 개 말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응원의 마음이 컸는데, 이것도 들어보라면서 들려준 곡에 이성을 잃었다.

자신이 직접 바닷가에 가서 마이크를 들고 녹음한 바람 소리와 적어도 40개는 넘을 것 같은 직접 녹음한 현악기 트랙이 담겨있었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냐고 묻자 동생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첼로, 비올라까지 연주할 수 있어 자신의 곡은 직접 스트링 파트를 전부 녹음한다고 말해주었다.

믹싱도 자신이 했다는데 수준급이었다. 공간에 맞는 리버브가 들어가 있었다. 믹싱을 어떻게 했냐 물어보니, 녹음할 때 여러 공간을 다니면서 적당한 공간을 찾았다고...

하루를 꼬박 바쳐 녹음했다면서 고충을 토로했지만, 고작 하루를 바쳐서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다니... 동생이 만든 곡은 내가 다음 작업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과 꽤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다. 그래서 머리에 핏대를 세우며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작업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작업 이야기가 나오니 너무 재밌어서 당장이고 뭔가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돌아가선 레슨을 해야 하고, 공연 준비를 해야 한다. 한참 그런 생활이 반복이니 그 에너지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이 작업은 한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동생과 헤어진 후에는 레슨을 해야 했는데, 레슨 할 때도 뒷골이 당기고 혈압이 올라 한참을 힘들어했다. 대화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그간의 고충도 함께 듣게 되었다. 몰랐는데, 한참 작업을 할 당시 달에 몇천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악으로 돈을 그렇게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일 년 가까이 한 시간만 잤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시 공황장애를 앓았고, 그 여파로 2년간 공연을 못 했다고 했다. 작년엔 큰 수술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모두 치열하고, 또 처절하게 살고 있구나.

동생은 피아노 위에 내 앨범을 올려놓았다고 했다. 가끔 저녁에 씨디 플레이어로 듣기도 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지인의 앨범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나는 피아노 위에 Kind of Blue를 올려두었는데...

동생과의 대화 속에서 스치듯 '누나는 가진 게 많아.'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짧은 칭찬이었지만, 그 속에서 다시 또 뭔가를 시작할 힘을 받았다.

그렇게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나를 오래 아껴주시던 선생님께서는 서른까지는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해주셨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며 했던 작업도 더러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저번 달 함께 작업했던 선생님께서는 서른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며, 그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지금까지도 죽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이 짓을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헛짓하고 있지만, 아직 기회가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요즘은 그 두 이야기를 조합해본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열리는 세상을 겸허히, 또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됐든 모두 나의 음악이고, 나의 선율이다. 세상과 더 잘 지내야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지금보다 아주 더 튼튼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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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한 번 마음을 다잡는군요^^ 고뇌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겠죠ㅎ 바쁜 일정 소화 잘 하세요.

이제 메이저가 되시겠군요. 왠지 그런 느낌이.

덕업일치!!! 누구나 꿈꾸는 일인 것 같아요.
동생분의 말처럼 나루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좋은 멘토분들도 많으신 것 같네요^^

달에 몇천을 벌어도 그 덕에 몸 다치고 일을 못하게 되면.. 머 그게 그겁니다. 땡겨 썼을뿐..

Posted using Moitto

왠지 읽다보면 멋진 일상을 보내고 계신다고 느껴집니다.
항상 화이팅~

백조가 물 속에서 두 발을 퍼덕이는 글을 쓰셨는데 읽는이의 입장에서는 멋있게만 보이네요. 일상도 작업도 멋지게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스트링을 다 녹음하고 거기에 바람소리까지 있다니, 그 동생 분의 다음 음악이 기대돼요.
바쁜 가을이지만, 돌이켜보면 뿌듯하실 것 같아요. 즐겁게 보내세요!

능력있는 후배네요.
천부적인 재능 머 이런건가요?

나이 30이 지나면 진짜 시작이 맞습니다.
20 대에서 그냥 무작정 열심이었다면 30 부터는 조금 색다른 기분을 느끼 실 것입니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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