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혹은 좌절

in #kr5 years ago

어제는 저녁에 레슨이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오랜만에 맞는 휴일이었다. 오늘부터 부산행으로 이어지는 강행군을 앞두고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큰일들은 끝난 상태라 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이사 온 지는 한 달도 더 지났는데, 그간 집에서 뒹군 날이 없어 내 집이면서도 낯선 공간의 느낌이 들었다. 일찍 눈이 떠져 전부터 가보고 싶던, 집과 가까운 도서관에 다녀왔다. 새집과 친해지는 과정 중 하나였다.

도서관은 귀여운 이름에 걸맞은 고요한 공간이었다. 책을 읽다 옆을 보면 푸른 하늘과 단풍으로 물든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계절마다, 날마다 다른 풍경이겠구나...


한 달째 같은 책을 붙들고 있었다. 이북 리더기가 고장 난 후로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곤 한다. 읽은 책은 남에게 주기도 하고 적당한 공간에 남겨두고 오기도 하는데, 이 책은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아 책갈피가 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다.

무게가 꽤 나가서 당장 버리고 싶다가도, 오늘은 읽을까 하는 기대에 늘 가방에 넣고 다니던 책이다. 그 책이 여전히 가방 속에 있을 때, 공연이 끝날 즈음과 맞물려서는 다시 무언가를 손으로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 다시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도서관에 갈 때만 하더라도 읽던 책이 있어 새로운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침 산책을 빙자해 위치 확인 겸 도서관을 간 것인데, 고요한 공간과 풍경이 아름다워 책을 골라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니, 어렸을 적 자주 읽던 작가의 신작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유명한 사람들... 적당히 쉬운 책 몇 권을 골라 자리를 잡고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다 보니 자꾸만 적고 싶은 문장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펜과 좋아하는 종이 위에 글을 적고 싶어서 마음이 자꾸 간질간질해졌다. 결국 아쉬움을 남기고 책을 빌려 집으로 일찍 돌아오게 되었다.


7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종일 읽었다. 오랜만에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몇몇 부분은 책을 읽으며 필사도 함께 했다. 모든 일이 끝나서일까, 아니면 좀 더 쉽게 읽히는 책을 선택했기 때문일까?


저녁엔 미루고 미루던, 피아노를 보러 갔다. 음악을 하지만 악기점에 갈 일은 몇 년에 한 번이니 내게도 생경한 경험이다. 넓은 매장에 빼곡히 채워진 피아노를 보면서, 다 쳐보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몇 개의 피아노를 골라 습관적인 곡 몇 개를 치면서 소리를 확인했다.

갈 때까지만 해도 가와이를 살 생각이었는데, 매장에 있는 피아노가 상태가 좋지 않은지 내가 좋아하는 가와이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많이 쳐서 익숙한 야마하의 소리와 타건감에 혹해 야마하로 마음을 정했다. 부산에 다녀온 후에 악기를 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계약은 하지 않고 나왔다. 몇 년은 칠 피아노인데, 이렇게 쉽게 골라도 되는 것일까?

피아노를 사일런트로 한정 짓다 보니 고를 수 있는 피아노가 많지 않았다. 헤드폰을 끼고 소리를 들으니 나무의 울림이 모두 사라졌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가 내 잔향을 앗아간 기분이었다.


어제 읽었던 책은 음악과 관련된 소설이었다. 그래서 더 쉽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깊이 공감했고, 가끔은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책에서는 음악을 글로 묘사했는데, 대지의 어머니 같은 연주라는 대목을 보면서 '말은 쉽지'라고 투덜댔다. 대지의 어머니 같은 연주가, 그런 곡이 있을까? 있다고 하더라도, 관객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곡이 있단 말인가? 또 그게 있다면 그건 클래식의 영역이겠지...

말 한마디로 '대지의 어머니' 같은 곡이 생기는 그 단순함에 괜히 뿔이 났다. 말뿐이라면 나도 어떤 음악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피아노를 보고 돌아와선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여유 있게 피아노 앞에 앉으니 뭘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댔다.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당장 공연이 있어 마음 놓고 하고픈 연습을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공연 곡을 연습하긴 또 싫고... 명상에 가까운 손 풀기로 건반과 다시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오늘은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 점검으로 빼놓은 연습 시간에 몇 달 전 연습했던 곡을 다시 쳐봤다. 클래식 곡이었는데 몇 달 전 연습 때만 해도 함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상상하며 반주자의 마음으로 쳤던 곡이다. 간단한 화성을 치면서도 바이올린의 선율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오랜만에 치니 그 아름다운 선율이 모두 색채를 잃어있었다.


얼추 일상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잠시 끊겼던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부산에 다녀오면 적당한 거리로 움직이게 될 테고, 그러면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여유도 생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알맞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틀어박혀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또다시 무너지게 되다니...

그런데, 그게 무너지는 것일까?


도서관은 어릴 적 내게 가장 평온한 곳이었다. 음악을 책으로 먼저 접했다 해도 무방할 만큼,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책에 나오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노트에 빼곡히 적고선 집에 돌아와 밤새 그 음악들을 듣곤 했다.

해야 할 것이 오직 하고 싶은 일이었던 시절. 오늘은 내가 그때로의 회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되었다. 불가능하면서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 나무의 울림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래서 하늘로 닿을 것 같은 선율을 만질 수 있는 곳으로 불쑥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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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직업적 상황에의한 고도의 신경 자학증에서 풀려나서 어깨 통증이나 마음이 복원되셨나봅니다. 원래 사는게 글치요?

대지의 어머니같은 음악은 어디에도 없지요. 그런데 어디에나 있기도 하지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른 사람도 반드시 좋아하지 않듯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줄수 있는게 과연 있을까요?

단지 대체적으로 좋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겠지요. 그 상황에 처해서 동참했던 모두의 모든 감각이 쾌락을 느낀다면 그게 대지의 어머니 음악 효과겠지요. 설사 그렇게 느꼈다고 해도 똑같은 그 상황은 재현되지 않지요. 늘 새롭게 다가오지요. 그렇기때문에 질투할 필요도 뿔나서 까칠해질 필요도 없지요. 그냥 현실에 한호흡 한호흡 충실하면 되지요.





개소리 왕왕!

그리고 나루는 욕심쟁이 후후훗!

책이 음악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곤 했군요.
700페이지짜리 책이 어떤 책인지는 끝끝내 밝히지 않으셨네요. 왠지 궁금ㅎㅎ

대지의 어머니 같은 음악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저도 둘째 아이의 피아노를 사야 합니다.
야마하 디지털피아노로^^
야마하는 할인매장도 없나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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