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 박제하기(!)

in #kr6 years ago (edited)

오늘은 일과 관련해 새로운 사람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가끔 일로 만나는 분 중에 제 음악을 미리 들어와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감사하게 이분도 그랬습니다.

곡을 잘 들었다면서, 제가 처음 만들었던 곡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 곡은 제 흑역사로, 1년 뒤에 유통을 금지시킬지, 2년 뒤에 금지시킬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곡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제가 너무 창피해하는 걸 알기에 제목조차 언급하지 않는 그런 곡입니다. 제 곡인데 저도 안 들은 지 몇 년 되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그분과 그 곡을 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이 곡은 처녀작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데뷔곡일 테고요. 대학에 들어가 과제로 썼던 곡인데, 이번이 아니면 평생 발매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무작정 만들어보았습니다. 이 곡을 만들던 시절을 저는 불필요하게 예민했던 시기라고 자조하곤 하는데요.

이때는 저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시절이었습니다. 오로지 제 욕심으로, 한 곡을 열 번도 넘게 합주했던 것 같습니다. 매 합주를 녹음해 듣고, 좋았던 부분을 추려 각 파트별로 악보를 새로 만들어주었어요. 멜로디와 코드가 적힌 간단한 악보에, 악기별로 코멘트를 자잘하게 넣어 연주자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그 덕에(?) 연주자들은 열 번의 합주 동안 늘 새로운 악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뽑았던 악보만 해도 족히 200장은 넘을 것 같아요.

잘하고 싶은 욕심을 악기의 수로 환산했던 저는 풀 밴드로도 성이 차지 않아 브라스 섹션을(심지어 리얼 녹음으로) 넣으려고 했는데요. 첫 브라스 편곡이라 엉성한 게 많았습니다. 결국은 여러 문제로 브라스는 빼기로 했어요.

이 곡을 들으면, 녹음실에서 허둥댔던 제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면 연주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 당시 저는 협의되지 않은 연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녹음실에서 크고 작은 잡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급기야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그 부분이 어디냐 물어보면 찾지도 못하겠네요.


이 곡을 녹음한 다음 날 녹음본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집 밖으로 나가질 못했어요. 잠만 잤는데 늘 녹음이 망하는 꿈을 꿨습니다. 진지하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시기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나'와 '현실의 나'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지요. 다 엎고 숨어 지내려던 제게, 동료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줬습니다.

그런 상태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이 곡이 오랫동안 흑역사로 남았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듣게 되니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곡을 듣다 보니, 그때 무리하게 욕심냈던 부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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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잠겨 녹음 당시 사진을 작게 올려봅니다.


저는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걸 좋아합니다. 스스로 '너 이것도 할 수 있어?', '그럼 이것까지도 할 수 있어?'라고 몰아세우곤, 그것을 해내는 쾌감을 즐기곤 합니다. 언제 내가 극한의 상황까지 갔었나 생각해보면 여지없이 음반을 준비하던 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열정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 앨범은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기간도 촉박했고, 편곡도 엉성했고, 그래서 완성도도 낮았기에 스스로 더는 음악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곡을 들으니, 시간이 지나면 이 앨범도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우연히도 며칠 뒤엔 앨범 작업을 도와준 분을 만날 일이 있습니다. 넌지시 "저 다음 앨범 준비할까 봐요"라고 운을 떼볼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진짜 잘하고 싶지만, 잘못하면 어떤가요. 돌아보면 늘 그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은 했던 것 같은데요.


옛날 생각이나 집에 돌아와선 예전에 편곡했던 브라스 버전 가이드 음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때 브라스를 포기하면서,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하고 미뤄두었는데요. 그 악보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잠들어 있네요. 기회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브라스를 포기하게 되면서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원래 관악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 이후로 곡에 한 번도 관악기를 쓰지 않게 되었어요. 예전에 이런 고민을 섹소폰 연주자에게 털어놓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꽤나 명쾌한 해답을 주더라고요.

나 원래 XX만원 받는데 공짜로 해줄게.

스치듯 얘기한, 이미 몇 년이나 지난 말이지만, 작곡가들은 이런 말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모른 척, 뻔뻔하게 전화나 해볼까 봐요.

"오빠? 그때 했던 말 기억 나시죠? 제가 진짜 좋은 곡 만들었는데 연주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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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극한에 몰아넣고 작업을 하고 난 뒤에는 후회가 없나요? 저는 항상 방어기제를 발휘해서 극한은 커녕 대략 20퍼센트 정도의 체력은 꼭 예비해두는데.. 그런 모습이 비겁해보이기도 하고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괴감 느끼기도 하고.. 욕심과 동력이 좋은 작품을, 좋은 사람을 끌어오나봐요.

저는 가능만하다면, 쓰러지기 직전까지 혹사시키는 걸 좋아합니다. 혹사기간(?)이 오면 커피를 하루에 다섯 잔 이상씩은 기본으로 마십니다. 그래도 피곤해서 잠은 오히려 더 잘 자고요. 밥도 더 챙겨 먹습니다.

20% 정도의 체력을 남겨놓는 것, 그것 나름대로 좋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많은 걸 소진하고 나면,힘들었던 기억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뭔가를 시작하기가 두려워져요. 근데 또 시간 지나면 자연스레 일을 벌이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고... 성향의 차이인지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것들은 그것 나름대로 다 좋은 게 있지 않겠어요?

어릴때라서 가능한 치기어림(?)이 아니었을까요. 그 과정이 없이 잔잔하고 잘 정돈된 어린날이라면 재미없을 것 같아요. 스팀시티 주제가만 들어봤는데ㅋㅋ 나루님의 음악이 궁금합니다. 올리신적있었나요?

맞아요. 지금도 어리니까 더 열심히, 치열하게 해봐야겠어요. ㅎㅎ 올린 적 없고 최대한 꽁꽁 숨기는 중이에요. ㅋㅋㅋ 스팀시티 주제가... 생각하니 다시 부끄러워지네요.

예전에 공연준비하고 할 때 꿈꾸면 대사를 다 까먹는 꿈을 많이 꿨었어요. 요즘도 가끔 꾸기도 하고요 ㅎㅎㅎ
전화하시면 아마 콜 하실 것 같습니다. ㅎㅎㅎ

무대에서 악보를 까먹는 거랑 연극 무대에서 대사를 까먹는 거... 완전 똑같네요! (제가 다 식은땀이 나는)

그래도 무대 생각을 하면 또 재밌어지지요? ㅎㅎ

역시 박제엔 스팀잇이 최고죠! 음악하시는 분의 고민을 엿보게 되어서 저는 왠지 새로 뭔갈 배워간 느낌입니다. 극한으로 몰아가는건 발악이기도, 철저함이기도, 프로정신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화이팅!

아드님이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더 재밌게 보시지 않았나 싶었어요. ㅎㅎ 저도 항상 에빵님을 응원하겠습니다. 같이 화이팅!

완벽이란 것이 어디 있겠어요~ 몇달, 몇년을 준비해도 결국에 모자란 것이 보일 겁니다. 좀 모자라면 어떻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느껴지면 또 뭐 어때요. 저는 뻔뻔함이 제일 큰 덕목이지 않을까 추천드려 봅니다.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전 습작은 흑역사이겠죠. 그런데 그 녀석이 싫지만은 않고... 미운 새끼라도 내 새끼니까요ㅎㅎ
그나저나 몇 년 전에 스치듯 얘기한 걸 아직도 기억하다니!
나루님은 기억력이 참 좋으시군요^^

글도 쓰고 나서 나중에 읽으면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

데뷔초에는 플레이어들과 소통하는 스킬이 아무래도 어설프다보니
누구나 이런 저런 잡음이나 아쉬운 부분이 생기는 것도 있겠지 싶어요.
심지어 저도 연주자 생활을 그래도 짧지 않게 했는데도 많이 어렵더군요.

그렇게 불만족스러웠어도, 한참 지나고나서 들어보면
좋은 것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죠.
지금의 나로써는 도저히 생각해내지 못할 아이디어같은 것들도 눈에 띄고.

아 글고 저는 사람들이 흘리는 말일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

-뭐 해준다,도와준다,가이드 필요함 불러 같은 말들-

이런거 알파고에 다 저장시켜 둡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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