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머나먼 선진국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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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2018-05-12(토)

최근 구미의 한 원룸에서 생후 16개월 밖에 안 된 아기가 20대 후반의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죽은 채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사실혼 관계에 있던 동거녀와 수개월 전 헤어진 후 아기와 단둘이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타살이나 자살 흔적이 전혀 없으며 사망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것으로 보아 경찰은 아버지가 지병으로 먼저 사망하고 아기는 그 옆에서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던 아기는 배고픔이 무엇이고, 부모의 존재가 무엇이며,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빠와 함께 하늘나라로 떠났다.

얼마 전 “창피하지만, 몇 일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쪽지를 남기고 죽은 가난한 예술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자살한 송파 세 모녀 사건 등, 잊을 만하면 극단적 가난과 고독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사건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수치스러운 ‘주홍글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소식들이 정반대의 다른 소식들과 함께 들려오는 데에 있다. 가령 지난 1분기에 해외에 나가 한국인들인 쓴 돈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는 뉴스 같은 것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 세 달 사이에 85억 달러를 쓰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무일푼과 무관심 속에서 죽어나간다. 한쪽에서 행복의 로망스가 울려 퍼질 때, 다른 한 쪽에서는 애끓는 장송곡이 울려 퍼진다.

너무나도 다른 이 두 세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조율의 가장 외곽에 있는 시스템이 바로 정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치란 “인간을 위한 최상의 선을 연구하는 것”이다. 정치는 국가의 내부와 외부에서 ‘최상의 선’을 실현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는 내부에서 전체를 조망하면서 신음과 통곡의 소리들을 민감하게 포착해야 하고, 그것을 안도와 희망의 소리로 바꾸어놓아야 한다. 정치는 외부에서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 내부의 구성원들을 광기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으며, 가장 문제가 많고, 가장 한심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치이다. 문제는 이 ‘나쁜 정치’가 사회의 다른 섹터들, 가령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으며 그곳에서 온갖 부패와 부정과 악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부의 절절한 소음들을 ‘최상의 선’으로 조율해야 할 정치가 온갖 영역에서 없어도 좋을 소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범죄들은 정치인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그들의 ‘땡깡’ 때문에 쉽게 될 일도 되지 않는다. 국회는 뻑 하면 개점휴업 상태다. 이 가난한 정치에서 무엇이 나올까.

정치인들이 ‘최상의 선’이 아니라 ‘최하의 악’을 생산할 때 죽어나가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다. 저급한 정치가 존엄한 국민들의 머리 위에서 온갖 소란을 떨지 않게 하려면, 먼저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기본적인 시스템이 잘 구비된 ‘선진’ 국가는 진보나 보수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별로 시끄럽지 않고, 어지간하면 저절로 잘 굴러간다.

선진국이란 진보든 보수든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기본’을 잘 구비하고 있는 나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안타깝게도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영역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기본이란 무엇인가. 사회안전망을 확고히 하고, 경제를 민주화하며,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 길이 이렇게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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