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 속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다

in #kr6 years ago (edited)

금요일 밤 11시 지리산행 산악회 버스를 탔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오전까지만 해도 비가 토요일 오후부터 내리는 걸로 예보돼, 이왕 예약한 산행을 그냥 강행했다.
차에 타니, 산행대장이 “전라도는 9시부터 비가 오고, 경상도는 12시부터 온다고 상세예보가 돼 있다”고 설명한다.
‘음, 9시 전에 전라도를 벗어나고, 12시에 하산하면 되겠구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웃긴다.

토요일 2시50분 성삼재에 도착했다. 종주를 하려면 여기서 내려야 한다. 나를 포함해 7명이 내렸다. 25-6명 정도는 버스에 그대로 앉아 있다. 그들은 백무동에서 장터목이나 세석으로 바로 오르는 코스로 가게 된다. 체력이 좀 부족한 분들도 있겠지만, 비를 맞기 싫어 짧은 코스를 택한 분이 대부분일 거다. 잠시 망설이다, 종주를 포기하고 나도 다시 버스를 탔다.

백무동에서 오르는 코스는 처음이다. 탐방소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장터목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으로 올라간다. 장터목으로 가는 길은 천왕봉까지의 거리가 가까워 초급자용이고, 세석으로 가는 길은 조금 난이도가 있는 코스이다.

밤인지 새벽인지 3시35분 백무동을 떠나 한신계곡으로 진입했다. 칠흑같은 어둠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계곡물 소리만 세차게 들린다.
5시 무렵 여명이 밝아오면서, 계곡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멋지다. 새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새소리를 듣는 신새벽이 나는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제법 가파르다. 세석까지 6.5키로인데, 가팔라서 한번에 올라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허기가 져 힘이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장거리산행 전엔 가급적 요기를 한다. 그런데 오늘은 밥을 먹지 못하고 그냥 시작했다. 산행 시작 전 조금이라도 요기를 하고 싶었지만, 초행길이라 일행과 함께 행동하느라 먹지 못하고 그냥 올랐는데, 가파른 오르막길을 2시간 정도 오르니 허기가 져 지친다.

세석 능선에 올라타기 500미터 전 계곡에서 혼자 김밥을 먹었다. 김밥 한줄을 다 먹었는데도, 계속 더 먹고 싶다. 이건 안좋은 거다. 장거리 산행 땐 배가 고파지기 전 미리 먹어야 한다. 일단 허기가 지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
삶은 계란 한개와 김밥 삼분의 일을 더 먹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무렵 뒤따라온 여성 회원이 포도를 조금 나눠 주신다. 고맙게, 맛있게 먹었다.

가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얼른 세석 능선에 올랐는데, 허거걱,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 구름속으로 들어왔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건물인 세석산장이 30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세석산장의 위치를 아니까 찾아갈 수는 있지만, 어차피 풍광을 볼 수 없고, 김밥은 먹었으니, 그냥 장터목으로 간다.

비가 아직 세차게 오지는 않는데, 운무가 지독하다. 말 그대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겨우 찾아 간다.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도중 잠시 길을 놓쳐 헤맸다. 이 구간은 길을 잃을 염려가 1도 없는 구간이다. 그런데 안보이니 도리가 없다. 왔다리 갔다리 헤매다 겨우 길이 보여 다시 걷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난다. 뒤돌아 보니까 운무속에서 사람이 불쑥 나타난다. “어디서 오셨어요?” “장터목에서요.”
이런, 내가 세석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거다. 서로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남기고, 장터목으로 뱡향을 다시 잡는다.

장터목에 도착했다. 김밥 남은 것과 계란 한 개를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정신을 차린다.
친목산행을 온 듯한 분들이 의견이 나뉘어 설왕설래 한다. 천왕봉을 가자, 말자 하는 말싸움이다. ‘가봐야 아무것도 안보일텐데, 위험하게 뭣하러 올라가느냐’와 ‘여기까지 와서 천왕봉을 안보고 돌아가는게 말이 되느냐‘의 논쟁이다. 둘 다 일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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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1.7키로. 매우 가파르다. 비가 와서 바위가 미끄러울 거다. 특히 이런 날은 바람이 무섭다.
비가 약해지길 기다려 천왕봉을 오른다. 바위가 미끄럽긴 하지만, 못 갈 정도는 아니다. 충분히 쉬고 올라왔는데도, 천왕봉 오르는 길은 역시 가파르고 힘이 든다. 아쉬운 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거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가 운무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정말 멋진 곳인데...

통천문이 보인다. 통천문의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두세평 정도의 전망대가 나오는데, 지리산의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 명당 중 한곳이다. 그곳에서 보는 지리산 대자연의 풍광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천왕봉까지 올라온 피로를 한꺼번에 보상해주고도 남는 멋진 뷰다.
노고단부터 반야봉, 삼도봉, 연하천, 벽소령, 세석평전, 장터목의 고사목지대까지 지리산 25.5키로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통천문을 통과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망대에 섰다. 그런데,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안보인다. 아, 그래도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보여줘야지, 정말 너무 한다 싶다.

통천문에서 천왕봉까지는 500미터다. 그 때부터 정말 어마무시한 비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한다. 몸이 휘청거리고 날려갈 것 같다. 철제난간을 잡고 버티면서 한걸음씩 올라간다. 앞은 안보이고,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정상이 가까워질 수록 바람은 더욱 거세진다.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레 올라 마침내 정상에 섰다. 비바람 뚫고 올라와 더 감격스럽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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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두명이 올라온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바람이 불어 휘청거려 위험하다. 사진만 찍고 곧바로 내려간다.

앞이 보이지 않아 중산리로 내려가는 방향을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가파른 내리막에 무릎이 아프다. 천왕샘과 법계사를 지나 로터리대피소에 도착했다. 마지막 남은 간식거리를 모두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린다. 서둘러 하산했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오후 2시20분.

백무동-세석-장터목-천왕봉-중산리 17키로 10시간 45분 걸렸다. 비도 오고, 휴식을 많이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이어서 거리에 비해 체력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사실 지리산의 핵심구간인데, 오늘은 풍광을 전혀 볼 수 없어 너무 아쉽다.
오후 5시 출발하는 버스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샤워도 하고 느긋하게 막걸리도 한잔한다. 종주산행을 하면 시간이 부족해, 여유있게 즐기지를 못한다. 단축코스로 오니 여유는 있는데, 좀 덜 걸은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종주를 못했다. 다음주 다시 와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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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시네요. 다음엔 좀더 안전한 산행을 하십시요^^

앗, 감사합니다. 등산을 하기 전에는 저럴 줄 모른거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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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글에 웃어도 되는건가요?ㅋㅋㅋ

‘가봐야 아무것도 안보일텐데, 위험하게 뭣하러 올라가느냐’와 ‘여기까지 와서 천왕봉을 안보고 돌아가는게 말이 되느냐‘의 논쟁이다. 둘 다 일리 있다.

어딜가나 논쟁이군요.ㅋㅋㅋ
(저는 요 포인트에서 웃겠습니다.)

못 웃겨 드려서 죄송함돠!!! ㅋㅋ

아 저도 바위 있는데까지 동네 뒷산 올라가던 날이 그립군요.

동네 뒷산이 혹시 지리산? ...

산스팀의 거장이십니다.^^

ㅋㅋㅋ 댓글의 거장이십니다!!!!!!!

대학교 다닐 때 딱 한 번 지리산 종주한 경험이 있는게 이젠 꿈같은 이야기네요.

한번 더 하시죠.

요즘은 1km걷는 것도 힘드네요.ㅎㅎ

저 또한 정상에 올라가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4년 전 친구들과 천왕봉을 올랐는데

눈이 오는 겨울날이었습니다.

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천왕봉 오르는데

정말 눈칼바람에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저처럼 많이 아쉬웠겠습니다ㅎㅎ

겨울에..., 대단합니다. 저는 천왕봉에 여러번 올랐는데, 모두 봄이나 여름이었습니다.
겨울에 눈칼바람 맞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보이겠어요. ㅋㅋ 꽃피는계절에 다시 한번 오르시지요

비오는 산행은 위험합니다.
무엇보다는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비오기 전에 내려 오려 했었지요. 제가 바보여요 ㅋㅋ

17km가 단축경로군요.. 천왕봉 가는코스가 꽤나 여럿있더라구요, 분명 조만간 천왕봉은 꼭 가겠습니다!!

곰돌이 더 증가하기 전에 가세요. 뉴스 보셨죠. 버스와 부딪쳤는데, 곰돌이는 멀쩡하고, 버스는 망가졌다는...

지리산 2탄인가용?ㅋ

3탄 쓰면 욕먹겠죠?

아니용ㅋ 같은글 두번쓴다고 누가 욕하나요ㅋ?

근데 2번 간 거 예요. 다음주에도 또 갈까 하는데, 안되겠네요 ㅋㅋ

힝~~왜요? 포기해도 가셔요^^~좋아보이는데용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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