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하다

in #kr6 years ago

우리보다 몇 학번 위의 선배들 중엔
민주화를 위해 청춘을 사르던 투사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도 그 영향이 남아있어
하루가 멀다하고 대자보가 나붙고 시위가 격열하여
돌과 최류탄이 난무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오후, 전공 수업이 있어 등교하려는데
정문이 봉쇄된 겁니다.
학생들과 전경이 대치하고 있고,
이미 최류탄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합류해야하나, 수업에 참석해야하나 망설이고 섰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칩니다.
같은 과 친구가 역시 등교하려다 알은체 한 겁니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속상한 차에 근처 슈퍼의 파라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6월로 기억되는데,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 진압복을 입고 진땀 흘리는 전경들도 딱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위 학생들도 않됐고...
차라리 하루쯤은 외면하자고 선배가 운영하는 민속 주점으로 향했습니다.

한숨과 자조 섞인 대화 속에 낮술은 계속되고
시간이 흐르니 낯익은 얼굴들이 점차 늘어나서
술이 좀 과하게 되고말았습니다.

늦은 시간 집으로 향하는데
변덕스럽게도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가 비처럼 흩날리는 겁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버스로 20분쯤의 거리인데
그날은 생각도 정리할 겸 걷기로 했습니다.

얼마를 걷다가 길 옆 작은 공원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벤치에 앉았는데
맞은 편 벤치에서 흩날리는 연무를 피하려 신문지를 덮고
노숙자 한 사람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깜빡 졸았던 모양인데
한 번 밀려온 졸음을 이기기 힘들어 가방을 베고 누워버렸습니다.

잠시 후 으슬으슬 냉기가 엄습하지만 일어나기가 싫어
살그머니 손을 뻗어 그 아저씨가 덮은 신문지 중 아랫쪽 것을 끌어와
덮었습니다.
냉기가 느껴지는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집니다.

달게 자다가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아 오고 있는데, 이런...
제 몸에 신문지 여러 장이 덮여있는 겁니다.

벼룩이 간을 빼먹던 녀석에게
그가 선행을 베풀고 자리를 뜬 겁니다.

겸연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 후로 노숙하는이를 보게되면 괜히
한 번 더 돌아보곤 합니다.

노숙.jpg
NAVER IMAGE- 어느 해 겨울 이런 광경을 서울역 지하도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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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지하도는 저도 충격이었어요.겨울만이라도 쉼터에 들어가시면 좋을텐데...

그러셨군요.
도울 길이 있었으면 합니다.

연민을 넘어선 인권문제도
심각한듯해요 ㅠ

아직 선진국은 아닌 듯...

노숙하시는분들도 사연 많으신분들도 많더라고요 ㅜ
hansangyou님 즐거운 저녁시간되세요^^

즐거운 주말되시길...

독특한 경험이시네요, 비박까진 그렇다 해도 노숙을 경험하긴 쉽지 않으니까요 ^^
어려운 일을 겪어보지 않고서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든 일이구나 생각해봅니다.

다음에 천사같은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할까 합니다.

이런사연 저런사연들을 간직하고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이 많죠.

사연없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술을 많이 좋아 하시네요.
함께 원 샷하는날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좋은 경험 해 보셨네요.

언제든지 원하시면 동참하겠습니다.ㅎㅎㅎ

청춘일때 한번씩 경험했던 일이지요. 캠퍼스 벤치에서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나네요. ㅋㅋ

ㅎㅎㅎ
딱 -- 아시겠네요.

젊었을때의 노숙이야 한번쯤은 다들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ㅎ
마지막에 있는 사진은 마음이 좀 아프네요.

경험하셨군요.ㅎㅎㅎ
사진 속 장면을 직접 목격하는 건 충격이었습니다.

아직도 힘들고 어려운 이웃이 많지요.
언제 쯤 우리나라가 어려운 사람이 없이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ㅠ

아... 뭔가 먹먹해지네요....
그 상황에서의 선행도 그렇고....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네요....

아직 치유되지않은
우리 모두의 아픈 모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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