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이태리 여행] 화산 폭발로 멸망한, 폼페이!
이미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려진.. 폼페이 (pompeii) 는..
기원전 89년에,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 였고..
로마의 상류 계급들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 였다고 한다.
그. 런. 데.
79년 8월 24일 정오.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거대한 폭발! 을 하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 내렸고..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폼페이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1592년. 이었다.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 되었던 것. 인데..
그럼에도 초기에는.. 발굴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발굴을 하더라도.. 거의 약탈 개념. 이었다가..
1861년에야..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면서..
조직적인 발굴이 시작! 되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발굴 작업으로..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 였다.
발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고대 로마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채로..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지! 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옛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평균 6m의 높이로 쌓여 있던..
화산재 덕분. 이었다.
약 2km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폼페이는..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들이..
모두.. 포장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횡단보도 까지 있었으며..
도로 중앙에 박혀 있는 돌들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설치 했던 것. 이라고 한다.
폼페이의 중심부. 에는..
‘포럼’ 이라 불리는 광장. 과..
그 주위로.. 신전들. 과..
시청. 이 있었던 부지와..
시장. 이 있었던 부지가 있었고..
또, 공동 수도와 수도관 시설이 있었으며..
공중 목욕탕. 과..
1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도 있었다.
폼페이에서 가장 큰 도로인..
‘델라본찬차 거리’ 는..
많은 여인숙과 술집들이 있었던 유흥가. 였는데..
당시의 로마인들이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 잘 보여주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 이었던 건..
남근 모양의 표시가 있는.. “사창가” 였는데..
매춘이 아주 싼 값에 성행했다고 하는..
폼페이의 사창가. 에서는..
남녀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에로틱한 그림들이 상당이 많이 있었고..
그 그림들은 손님들에게 어떤 서비스(?!) 가..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잊을 수 없었던 건..
화산 폭발 당시에..
빠져나오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화석으로.. 남아있었던 것인데..
(당시 인구의 10%인, 약 2천여 명이..
도시와 함께 매몰 되었다고 한다.)
발굴된 사람 화석을 통해..
당시의 참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 해서..
정말로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ㅠㅠ
참고로..
폼페이의 사람 화석은.. 실제 사람은 아니었고..
희생자들의 피부를 완전히 덮었던..
화산재가 굳어져서 고유의 형태를 만든 후..
화산재 내부의.. 육체는 썩어서..
빈 공간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빈 공간에.. 석고 반죽을 채워 넣자..
폼페이 사람들의.. 최후의 순간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게 된 것.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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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깊이 6미터의 화산재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폭발이었군요.
정말 어마어마했죠... 그러니 아예 도시가 파묻혀서.. 완전히 사라졌던 것 같아요~ 그걸 또 파헤치려니.. 아직도 발굴 중. 인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