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나날 8

in #kr6 years ago

"어제 자혜 많이 화났죠?"

"음, 별로."

"휴! 다행이네. 어제 괜히 강재 씨한테 술을 권해서……."

"괜찮아. 아무 일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나는 소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름을 발랐는지 소정의 머릿결은 매끄러웠다. 소정이 내 가슴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어 왔다. 나는 소정의 머리를 정성껏 쓰다듬었다. 소정은 이상하게도 애완견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만지는 건 싫은데, 강재 씨가 만지면 아주 기분이 좋아요."

"묘한 버릇도 다 있군."

"버릇이라뇨?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을 받는다는 게 여자에겐 얼마나 가슴 벅찬 환희라는 걸 모르는군요. 하지만 요즘 들어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거 있죠?"

"뭐가?"

"공부도 내가 잘했고, 옷도 내가 더 잘 입고, 집도 우리 집이 훨씬 부자인데도 늘 자혜한테 뒤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도 이만하면 못생긴 것도 아닌데, 늘 남자들은 나보다 자혜에게 더 관심이 많았어요. 강재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게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들이 다 억울한 거야."

"보세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잖아요. 어제는 자혜가 얄미워 일부러 강재 씨 술 먹인 거예요. 봐라. 강재 씨는 네 말보다는 내 말을 더 잘 듣는다. 일종의 시위였죠. 오늘만 해도 자혜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우린 헤어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억울하지 않겠어요?"

"미안해. 만약 나보고 자혜와 소정,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두 사람 다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게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느 한 쪽을 택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가끔 세상에는 내 것과 네 것으로 명확히 선을 그어 소속을 분명히 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내게 있어 소유관념이란 이기심에서 파생된 불유쾌한 부산물일 뿐이었다. 짧은 인생에서 소유권 논쟁이야말로 소모적인 것이 아니랴!

또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만 상처를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게 고통을 몰아줄 바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 그 상처를 나누어주는 게 낫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어쨌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세상살이에는 신기하게 잘 통용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물론 두 사람 이상으로 나 자신은 더욱 더 고통 받아야만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면 어쩔 수 없이 자혜보다는 소정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단지 후발주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나 또한 형보다 단지 오 년 늦게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껴야 했던가! 형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의 처지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따지고 보면, 그런 하찮은 이유로 더 많은 불이익이 파생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이 의도적으로 내게 핍박을 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형은 늘 성실했고 모든 것에 충실했다.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한 번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누가 보아도 모범적인 인간이었다. 어느 누구도 형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했다.

그래도 형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형이 나보다 더 성실함으로 해서 내 작은 성실은 형의 큰 성실에 묻혀 빛을 잃었고, 내 작은 선행은 형의 큰 선행으로 인해 의미를 잃었다. 형의 뛰어난 두뇌는 언제나 나의 두뇌가 따라가지 못할 엄청난 족적만 남고 멀리 달아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나는 형을 이기지 못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형이라는 큰 황새를 쫓아가는 뱁새의 분주한 발놀림이었고, 형을 능가한다는 생각은 신을 모독하는 것 이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형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잘난 형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형은 자신의 재능과 자질에 그처럼 찬사를 마지않던 이 땅을 버리고 어느 이국의 하늘에 있단 말인가! 그토록 형을 시기했으면서도 나는 형의 실패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형은 나의 경쟁자였을 뿐 아니라 삶의 동반자이기도 했으므로.

어쨌든 나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다. 형은 이 땅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떨려 났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사랑하는 여자와 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형을 용서하고 있고, 또 형이 내게 용서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솔직히 말해 나의 진심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교만이 만들어 낸 헛소리일 뿐이다. 나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그 무엇도.

"그래도 저를 안 버린다니 기쁘네요. 오늘도 그 말을 들은 걸로 만족하고 헤어져야겠죠?"

"……."

"요즘은 어느 날 갑자기 강재 씨가 저보고 그만 만나자고 할까 봐 괜히 겁이 나요? 매일 매일이 그 생각뿐인 거 있죠? 나,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강재 씨 만나고 이렇게 못나게 변하고 말았어요."

"……."

"미안해요. 화난 거 아니죠? 강재 씨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무서워요. 다시는 이런 얘기하지 않을게요. 정말 화난 거 아니죠?"

"그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무척 화가 났다. 정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무엇에든 얽매이고 싶지 않았었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고달파지는 게 인생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게다가 특수한 일을 하고 있는 내 처지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든 일정한 거리나 간격을 두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은 언제나 먹혀들었다. 그것만이 나를 지키고 상대를 보호하는 현명한 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지 말도록 하게. 아니, 되도록 현재의 친분관계도 대폭 줄이는 게 좋아. 쓸데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지 말라는 거야. 그게 자네한테도 상대방한테도 이로울 테니까.”

장 부장은 회식이 끝나고 각자 제 갈 길로 헤어지면서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그런 말을 내게 툭 던졌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사람을 차러 칠 뻔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거리라는 것을 항상 ‘안전거리 확보’라는 용어로 먼저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안전거리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렇게 옆에서 재잘거리는 소정이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화가 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소정이 좋았다. 화만 나지 않으면, 이렇게 화만 나지 않으면 말이다.

"언제 와도 남산은 좋아.“

소정이 딴청을 부리는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억지로 쾌활함을 가장하는 그녀의 배려가 늘 고마웠다. 남산이 아니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언제 와도 한강은 좋아. 언제 와도 바다는 좋아. 언제 와도 강재 씨와 함께라면 좋아. 그렇게.

"어……. 시간 늦겠네. 어서 가요. 강재 씨! 자혜, 강의 끝날 시간이 다 돼 가요.“

나는 소정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매끈한 달걀껍질처럼 반들반들한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나로서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아니, 미워해서는 안 될 여자였다. 소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애완견처럼 내 손길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다. 나는 소정의 뺨을 쓰다듬다가 불현듯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동해안에 가고 싶지 않니?"

"동해안이요?"

"자혜한테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하자. 그런 다음 우리 바로 동해안으로 직행하는 거야.”

강재는 자혜에게 전화를 걸며, 차를 빠르게 몰았다.

그래, 어쩌면 오늘은 바닷가에서 소정과 정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소정이 나의 육체를 갈구하는 것이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소정과는 결코 정사를 치르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나와 소정을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는 자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은 아득한 예감이 들었다. 자혜를 속이는 일이 처음 한 번은 어렵겠지만, 두 번 세 번 거듭될수록 식은 죽 먹기가 될 거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는 것이다. 모반을 꿈꾸는 배반자가 된 것처럼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차는 빠르게 남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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