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연의 백미

in #kr6 years ago (edited)

당일치기로 울산에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SRT를 이용하면서부터 지방 공연이 한결 수월해졌지만, 그렇다고 부산이나 울산 정도의 거리를 당일로 다녀오는 것이 만만치는 않다. 두어시간 앉아 있는 것만으로 크게 지칠리는 없으니 고속 철도의 속도감과 진동, 소음 등이 피로를 더하는 것일거라 믿고 있다.

가방과 악기를 양 어깨에 메고 움직여야 하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짜증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집을 나설때쯤 비가 좀 잦아들어서 접는 우산으로 바꿔들고 짧은 거리는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택시 하차장에서 수서역 건물로 향하는 길 위쪽으로 비를 막는 지붕같은 게 늘어서 있다는 건 오늘에야 알았다. 작은 우산을 챙기기를 잘했다.

울산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 층 위에 있던 우동집은 오후 한 시에도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악기며 가방이 무겁지 않았으면 다른 식당으로 옮겼을 테지만 이미 지쳐가고 있던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돈부리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음식이 나왔고 -손님이 없으니 당연하다-, 정말 맛이 없었다 -손님이 없는게 당연하다.

대충 먹고 일어나 택시를 타고 공연장으로 이동하자니 예상보다 제법 요금이 많이 나왔다. 요금을 내려고 신용카드를 내밀자 카드 결제기가 고장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사아저씨는 짜증을 냈고 그 와중에 나는 머릿속으로 공연 페이에서 교통비를 빼면 얼마나 남을지 몇 번 어림짐작해보았다.

가만 보자니 오늘 나를 둘러싼 여러가지의 사소한 행운과 불행이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공연장에서 사운드 체크를 마치고 무대 옆 대기실로 향하려는데, 직원 한 분이 좋은 대기실이 일 층에 따로 있다며 그곳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래 지하보다야 낫겠지, 여기 대기실은 너무 작네 하며 따라갔다. 그랬더니 펼쳐진 대기실이 이랬다. 사실 사진은 공간의 삼분의 일 정도만 나온 거지만.

IMG_3467.JPG

레이지보이 리클라이너에 누워 음악을 들으려 했으나 이내 코를 골게 되었다. 잠깐 졸고 나서 매킨토시 앰프와 탄노이 캔터베리GR 스피커를 통해 조성진, 백건우, 마리아칼라스 등등을 들어보았다. 보기에 그럴듯한 시스템의 위용에 비해 뭔가 인상적인 것은 없는 소리였지만 지금 대기실이 오디오샵 청음실이기를 바랄 건 아니지 않나. 누워서 뒹굴거리며 공연 시간을 기다리자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이후에도 사소한 행운과 불행은 계속되었지만 대기실 하나로 승부는 이미 결정나 있었다.

예를들어 저녁 식사. 가격이 제법 나갔지만 맛은 지독히도 없었다. 양이 엄청났는데, 그게 오히려 흠으로 느껴질 만한 맛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지진 않았다. 공연은 무난히 마쳤고 총알택시 기사님의 도움으로 예매한 기차보다 한 시간 넘게 이른 기차로 출발하게 되었다. 조수석의 안전벨트가 고장나 있는 택시는 120킬로미터 언저리에서 달리다가 종종 140킬로미터 가까이 속도를 냈다. 시간을 번 대신 왕복으로 예매했던 표를 취소하고 다시 발권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손해가 생겼다. 내 시간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자니 아주 조금 우울해졌다.

대기실 사진을 다시 봐야겠다.

201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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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비를 빼면 얼마 못 건지셨을 것 같네요~ 정확한 페이는 모르지만요
고생 많으십니다 ㅎ

지방공연이 좀 그렇죠 ㅎ 하루를 다 쓰는데다가 경비도 제법 들고 ㅠ 이젠 늙어서 당일로 다녀오면 후유증까지 ㅎㅎ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데서 자본주의의 힘을 가장 강하게 느끼곤 합니다. 그나저나 저 대기실은 거실로 옮겨 놓고 싶을 정도로 좋군요.

사진에 안나온 면적이 더 넓어요 ㅎ 널찍널찍하게 공간을 쓰는게 인테리어의 완성이 아닌가 합니다 ㅠ 공간 안에 들어간 것들도 만만치 않지만 일단 저만한 공간을 갖는건 넘사벽이니.....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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