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질투는 나의 힘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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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대초,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을 냈던 시인 기형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여러 시인들을 소개한 어떤 책을 통해서였다.

 기형도, 1960년에 시작되는 그의 연보는 1989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다. 사인은 뇌졸증.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본명 그레고리오)."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중에서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요절한 그의 이력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면 그저 ‘기형도’라는 요절한 시인 하나가 있었구나, 하고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같은 책에 소개된 '빈집'이라는 시가 그를 기억하는데 중요한 이미지가 되었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입속의 검은 잎.jpg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총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에선 시종 무거운 분위기 풍긴다. 두 번째 파트엔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더러 있다. 시들의 공통점은 시인의 일상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의 이미지들과 자잘한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저 관념으로 그치는 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경험적 이야기의 묘사 혹은 재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관념적인 시보다 오히려 더 난해하게 다가온다. 경험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라 공감되지 않으면, 그 어떤 인문학적 명제보다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들 중에서 관념적이라서 오히려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하나 소개한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탄식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는 시인의 고백에 마음이 뜨끔하다. 이것이 내 청춘의 자화상이 아닌가.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보니, 질투로 인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고, 삶 속에 몇 안 되는 그 역동성만이 희망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2

 2002년에 이 시의 제목만 딴 것이 분명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개봉했다. 박해일, 배종옥이 주연을 맡았다. 박해일은 착실한 대학원생이다. 그는 유부남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자신에게 애인을 빼앗아 간 유부남(문성근)을 우연히 만나게 된 그는 호기심으로 문성근이 편집장으로 일하는 잡지사에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진작가 배종옥에게 빠져들지만 이미 배종옥은 문성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질투심이 폭발한 박해일은 배종옥에게 매달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박해일이 질투로 인해 망가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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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는 역시 힘이 세다. 꼿꼿하고 성실한 한 사람을 밀어 넘어뜨릴 수 있다. 의연한 사람을 대책 없이 화내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내가 질투를 했던 기억을 되짚어본다. 질투가 얼마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었던가, 얼마나 수많은 ‘불면의 밤’을 양산했던가. 몸에 밴 의연함도 질투 앞에선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3

 대학 3학년 때 국어교육과 내에서 창작분과 활동을 했었다. 분과 활동으로 한 학기 동안 시를 나누기로 하고 분과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집을 정하여 읽었다. 각기 기형도, 안도현, 백석의 시를 읽고 그들의 시집에서 하나의 시를 차례로 뽑아 함께 감상을 나누었다.

 내가 속한 조는 기형도 시집을 선정했고, 우리는 <질투는 나의 힘>을 발제 시로 정해서 함께 감상했다. 물론 시인과 시 선정엔 내 입김이 많이 들어갔었다.

 <질투는 나의 힘>을 놓고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열 댓 명의 분과원들이 과방에 둘러 앉아 시 감상을 나누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참 풋풋하고 낭만적인 시간이었다. 서로의 감상에 귀를 기울이다 감탄하고, 또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 때 설렘과 긴장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십 수 년이 지나서, 난 그 시간 속에 있던 나를 질투한다. 시인의 시는 내 삶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질투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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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기형도를 읽고 아파해본 것은 어찌보면 큰 행운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늙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요절한 기형도는 젊은 날의 고뇌를 선명히 전달해주었지요.

솔메님 덕분에 기형도 시를 밤에 읽게 되네요.
밤이라서 그런지 엄청 슬프게 들려요.

'마음에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고등학교때 물론 수준은 엄청 다르겠지만서도 혼자 보는 글마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돌려 말하는 시나 글을 쓰곤 했죠. 그때 저 역시 저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10년이 지나서 읽으니 감정만 남아있고 저조차도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잃고 싶어 그리 썼던 걸까요?

어쩌면 고등학교 솔메님은 지금의 솔메님을 질투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시 한편으로 여러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 수 있는 에세이를 쓰시는 지금의 솔메님을 말이죠.

억 청승은 여기까지 자야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혼자 보는 글마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돌려 말하는 시나 글을 쓰곤 했죠.

예전에 글쓰기가 느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바로 이 얘기를 했었어요ㅎ 모호하고 관념적이기 그지없는 글이 구체성과 적확함을 획득하는 것. 그게 글쓰기가 늘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요.

고교시절 고물님은 지금의 고물님을 확실히 질투하겠군요^^ 오늘도 꾸역꾸역 글 한 편을 썼다는 것에 마지못해 만족해야겠어요.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ㅎㅎ

남을 질투하는 마음은 사실 어떻게해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주변인이라면 더더욱이요. 나 자신을 질투한다면 가장 건강한 질투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질투하는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큰 일을 이루어내기도 하지요.ㅎ 나 자신을 질투할 건덕지가 많진 않지만, 나이나 시간, 풋풋한 기억들. 뭐 그런건 질투할만 하더라구요. ^^

젊은 시인의 시를 젊은 시절에 읽었었죠
그 시인의 삶, 글의 형태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알 수 없단 사실이 마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시인이 찍은 마침표를 훌쩍 넘어 살아가다 보니
이미 기형도의 인생은 그 시절에 완성이었더군요
오랜만에 시인을 떠올립니다

기형도 시인을 마음 한 켠에 간직한 또 한 분이군요. 보기 아까운 별은 참 빨리도 떨어지더라구요.
뉴비시군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활동 기대할게요^^

읽으면서 그냥 눈물이 뚝 떨어진 시가 빈집이지요.
그 당시 사랑을 잃은 것도 아니었는데 제가 빈집에 갇혔다고 느껴서 인지..
잊지 못하는 시 중 하나 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었군요.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이 딱 들어맞는 시인이었지요. 시를 읽으시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감성입니다. 역시 서클님의 감성, ^^
넘 오랜만인 거 같네요. 반가워요 ㅎㅎ

갑자기 기형도 시인의 시집이 읽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여기 저기 언급된 글과 이름으로 자주 들었던 시인이네요.
시집은 가까이 두려고 했다가도 도망가고 하더라구요.
읽어야지 올려두고는 딴짓 하고~~ 하나 읽고.. 묘한 마음에 사로 잡히고.. 시는 저에게는 뭐랄까.. 아득한 안개안을 헤메는 느낌입니다 ㅎㅎ

모든 시를 다 읽어야 하고, 다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만 벗어난다면 시는 꽤 친숙해질 수 있는 거 같아요^^
안개 같은 시는 패스하고, 먹어서 맛있는 사과 같은 시만 베어물면 되는 것 같아요ㅎㅎ

팁 감사합니다. 그저 경험하려고 하는데 자꾸 분석하는 녀석이 튀어나와서 ㅋㅋ 사과같은 시 좋네요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사람, 스스로를 미워하기는 하는 걸까요. 그래도 시에서 깊은 좌절은 와 닿네요..

좌절의 힘, 절망의 힘도 시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시인의 위대함인거 같아요^^

시와 시인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요절하신 줄은 몰랐네요. 오래 살았다면 나이든 그는 어떤 시를 남겼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러게요. 나이를 먹으면서 주제와 톤도 조금씩 달라졌겠죠?^^ 저도 궁금해지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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