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중고서점 시리즈] 그 후의 일상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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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친구와 밥을 먹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시내에 일찍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그곳,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아이들 없이 혼자 중고서점에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위협은 없지만, 둘러볼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책을 고르다가 만나기로 한 친구가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 한 권이 눈에 걸렸다. 친구 장은 결혼하고 작년 한 해 주말 부부를 하다 이번에 고향을 떠나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다음 달엔 아내가 출산도 앞두고 있다. 다른 친구들보단 조금 늦게 육아의 세계로, 진짜 결혼 생활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책은 제목만으로도, 장이 언젠가 한 번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법한 질문에 답을 줄 것 같았다.

알랭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이 책을 장에게 무조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출간된 지 삼년도 채 되지 않은 책이라 그런지 중고서점에 있던 책은 비교적 깨끗했다. 하지만 아주 예전에, 우리가 함께 첫 번째 대학교에 다닐 때 그가 했던 얘기가 퍼뜩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낡은 책을 빌린 내게 그가 말했다. “난 오래된 책은 못 읽겠어. 책을 펴면 벌레가 나올 거 같단 말이야.”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새 책을 사서 읽었었다. 난 책을 다시 꽂았다. 지금이 새 책이 필요한 때였고 중고서점에 등을 돌려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친구에게 벌레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책을 읽으라고 줄 순 없었다. 난 고른 모든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근처에 있는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거기서 알랭드 보통의 새 책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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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다. 고3때 우리 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리를 바꿨는데, 월요일에 앉는 자리가 일주일동안 자기 자리로 정해졌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월요일에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지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각 직전에 도착하곤 했다. 그 시간에 오면 남는 자리는, 선생님의 침을 맞으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2분단과 3분단 맨 앞자리였다. 가끔 맨 뒷자리가 비어있기도 했다. 장도 집이 멀어서 늦게 왔고, 한 3번 정도 그렇게 그와 짝이 되어 안면을 텄다. 지독히도 말수가 적었던 장은 그 당시 내 눈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였다. 처음 그와 짝이 되었을 때, 일주일동안 그가 내게 했던 이야기는, “지우개 좀 빌려줘.”가 전부였다. 그와 짝이 되지 않았다면 결코 그와 친해지는 행운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친분이 생기고서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면서 우린 더욱 가까워졌다. 대학교 시절 우린 시간을 거의 함께 보냈다. 120명 가까이 뽑았던 학부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지내며 겨우겨우 수업을 들었고 빈 시간엔 당구장이나 도서관을 함께 전전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그와 나는 각각 다른 곳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가 먼저 제대해서 복학을 준비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온 그의 모습과 성격은, 완전 바뀌어 있었다. 나만큼 마른 체형이었던 그는 뒤룩뒤룩 살이 쪄 있었고, 내성적이고 말수 없던 성격은, 원래도 잔정이 많았지만 친구들의 만남을 주도하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에 총을 맞고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사람이 완전 다른 사람처럼 살아가는 내용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혹시 군에서 총을 맞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내가 아는 한 군대에서 가장 크게 변화된 친구다.

 난 그보다 조금 늦게 군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진로를 위해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공대에 복학했고 난 수능을 쳐서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교대 3학년이 될 무렵에 그도 수능을 다시 쳐서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내가 교사로 발령 받아 근무한 2년 뒤에 그도 교사가 되었다. 우린 함께 같은 대학원에 진학했고, 6번의 여름과 겨울을 대학원 기숙사에서 함께 보냈다. 장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릴 때 여전히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소리를 냈고, 늘 나보다 먼저 잠이 들었고, 격한 운동보다 주변을 천천히 걷는 걸 좋아했다. 그런 그가 작년까지 싱글로 지내다가 다른 도시에 사는 예쁘고 참한 여성을 만나서 결혼했다. 그는 결혼 전 아내가 될 여자 친구에게 친구도,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도시로 기꺼이 가겠다고 약속했고, 이번에 전출이 성사되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최근엔 내가 육아 세계에서 헤매느라 바빠서 자주 보진 못했지만, 갑작스런 이사 소식을 듣고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

 교보문고에서 새 책을 사서 약속 장소로 갔다. 함께 만나기로 한 다른 친구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장은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에게로 다가가 책을 건네며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 어떤지 묻자, 그는 헛헛하게 웃으며 말했다.

 “군대 가는 기분이다.”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좋은 시절 다 갔다.” 난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시간은 제대도 없다, 는 말은 차마하지 못했다. “다음 달에 애 낳으면 당분간은 좀 힘들 거다. 근데 거기에 친구 없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육아란 그런 거다. 어차피 하던 모임도 없어지고, 친구 만나는 것도 뜸해지거든.” 그래도 희망적인 얘기 하나는 해주어야 할 거 같아서 덧붙였다. “애는 귀엽다. 애가 주는 기쁨이 있다.”

 함께 만나기로 한 다른 친구는 6살 쌍둥이 아빠 김이다. 김이 도착해서 우린 찜닭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서 장이 아까 내가 줬던 책이 뭔지 확인했다.
 “조만간 네가 실감할 얘기야.” 책 제목을 확인하던 장에게 내가 말했다.

 나와 장과 김은 육아의 고충, 단조로운 일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대해 말하며 나와 김은 장에게 겁을 주기도 하고, 조언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이등병의 외박처럼 가뭄에 단비처럼 얻는 자유시간의 달콤함을 얘기하고 아빠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소한 우리들에게 그 모든 하소연들은 아주 넓은 원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결혼 생활의 행복 안에서 오가는 말들처럼 보였다. 그 행복의 원은 너무 너무 넓어서 평소엔 그 경계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 행복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지금 내가 아직 혼자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광활한 원의 경계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이가 웃으며 달려들 때도 그 원의 경계가 보인다.

 언젠가 장이 ‘그 후의 일상’에 대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줬던 책에서 벌레가 나올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 이사 잘하길. 아이 건강하게 출산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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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 61 (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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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단편소설읽는거 같아요
김, 장, 그리고 키슬님도 행복하길~!!!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찡여사님도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군대가 사람을 그렇게나 변화시킬 수 있는 곳이라니...
군대 다녀오면 철든다는 이야기도 괜한 말이 아니겠어요.

군대 갔다와서 변화된 사람들이 꽤 있더라구요. 역경이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가봐요ㅎ

The courses of love 는 저도 중고서점이 아닌 새 책으로 구입했었는데 통했군요!? 🙃 알랭 드 보통은 왠지 새 책을 사줘야 할것같은 느낌이. ㅎㅎ 오늘도 소소한 에세이 힐링 얻고 가요.

혹시 원서로 구입하셨나요? 번역되지 않은 알랭드보통의 원래 문장을 읽는 맛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ㅎㅎ
힐링을 드렸다니 기쁩니다. 그게 제겐 힐링이네요^^ㅋ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오래된 책에서 벌레가 나올것 같다니... ㅎㅎ 친구분이 좀 엉뚱한데가 있는것 같은데요^^

ㅎ 진짜 벌레가 나올 거 같은 기분이 들었나봐요ㅋ
그 책 제목만 보고 선물했는데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래도록 함께할 친구라는게 함께한 시간에서 느껴지는 것 같네요^^

네 자주 보진 못하겠지만, 가끔씩 오가며 함께 해야지요ㅎ

제 친구들도 다들 일과 육아 때문에 바빠요.
농담으로, 애들 다 키우고 50대에나 만나서 놀자고 하는 판이니..

다들 형편이 비슷하군요ㅎ
50대엔 실컷 놀 수 있을까요~~ㅋ

ㅎㅎㅎ 기차 화통에서 괜히 빵 터졌네요. 좋은 친구분들이시네요~
인생이 다 그런거겠죠? ㅎㅎ 나중에 다시 세분 만나시면 또 재미있을 거 같아요~

기차 화통은 원래 빵! 터지는 거죠.ㅋ
좋은 친구들이 가까이 있는 게 즐거운 인생이죠.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또 만나게 되겠지요.^^

육아 힘들지요. ㅎㅎㅎㅎㅎ 장님의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랍니다. ^^

ㅎㅎ '그때엔 짐, 이제는 힘이된',, 그런 게 가족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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