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여러 가지 色, 맑음

in #kr6 years ago (edited)

여 러 가 지 색,  맑 음

   S o u l  e s s a y  


 예전에도 한 번 밝힌 적 있지만, 집에서 영화를 볼 때 한 편의 영화를 2~3일에 걸쳐 나누어 보곤 한다. 평론가의 자세로 영화를 샅샅이 훑어본다거나 어린 애가 사탕을 아껴 먹는 심정으로 영화를 아껴 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시간을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손에 쥐게 되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기엔 시간 계좌의 잔고가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를 자주 보진 못하지만, 어쩌다 영화 볼 마음을 먹을 땐 아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간당간당한 시간 계좌에서 시간을 꺼내 써도 아깝지 않을 영화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을 주고 산 영화는 환불이나 교환이 안 된다. 그래서 난 영화를 보기에 앞서, 늘 몇몇 후보를 두고 고심한다.

 이번엔 장르가 다른 두 개의 영화를 두고 고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과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가 후보작이었는데, 좀 밝은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 <리틀 포레스트>를 선택했다. (선정을 축하합니다, 임순례 감독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이번 칸 영화제 대상도 받았으니 다음 기회에 도전해주세요.)

 <리틀 포레스트>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시험에 낙방하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혜원은 시골 집 주변의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해먹고, 고향 친구들(류준열, 진기주)과 어울리면서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인물들의 ‘맑음’이었다. 주인공의 경우는, 이야기 속 인물보다 이를 연기한 배우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김태리는 서울에서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아 불안과 피로에 찌든 청춘이지만, 고향집에 내려와 요리 재료를 다듬고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실 때는 얼굴에서 빛이 난다. 김태리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맑음’이, 쌓인 눈에, 내리쬐는 봄볕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사실 이 영화는 김태리의, 김태리에 의한, 김태리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특유의 매력으로 영화를 힘 있게 끌고 간다. 김태리의 표정만 쫓아가도 영화는 흥미롭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김태리의 동네 친구 류준열은 또 다른 의미에서 ‘맑음’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귀농한 류준열은,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게 싫’다고 선언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준열이 적당히 타협하고 인내하면서 버티지 않고 뛰쳐나온 것은 욱하는 심정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영화에서 내뱉는 말들을 보면, 귀농은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이다. 흐리고 자유롭지도 않는 물에서 더 이상 살아가길 거부한 것이다. 그의 맑은 성정이 그걸 못 참아낸 것이다. 그의 맑음은, 주사(酒邪)에서도 드러난다.

“봄에 말이야. 작은 새싹들이… 어… 거룩한 하늘을 향한… 어떤 그런 작은 대지의 정령들? 그래서 난 정말 멋진 직업을 선택한 거 같애.”

 조직 사회에서 상사의 인격 모독을 참아내며,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없는 사회생활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들이 ‘맑음’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얘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위대함이 있다. 류준열이 회사를 ‘박차고 나와’ 귀농한 것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나와서 어떤 마음으로 농사일을 대하는지에 ‘맑음’의 방점이 있는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jpg

 각박한 삶 속에서 찌들린 청춘들이 맑음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는 일, 맑음을 간직한 친구들이 만나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걸 보는 일이 바로 이 영화의 즐거움이다.

 나도 맑은 친구들과 언제든 만나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 앉아 맑은 눈빛으로 정담을 나누고 싶다. 모두가 서로의 편인 사람들과. 소박해 보이는 그런 일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판타지가 되어 간다.

그녀는 내게 맑다고 말했다




 이십 대 초, 입대를 앞두고 휴학 중일 때 시립도서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남이 볼 땐 아무 효용도 없는 읽기와 쓰기가 도서관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도서관 매점에서 만난 그녀는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다. 내게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된 사람. 내 영혼을 그렇게 바라봐 주고 표현해준 처음이자 마지막 여인.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눈을 보니 참 맑아요. 그런 얘기 많이 안 들어봤어요?”

 그녀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혼자 앉아 있던 내게 말을 건넸다. 참 예쁜 누나였다. 퍼지지 않은 컵라면을 음식물 수거통에 쳐 넣고 마주 앉고 싶을 만큼 단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맑음’이라는 평가를 건네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혹시 도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난 속으로 외쳤다. 네, 여러 번 들어봤지만, 또 들어보고 싶어요! 하고.

 사실 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따르는 ‘도’로 나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도를 따르기로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녀가 천지개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 난 그녀가 어디서 살았으며 어떤 계기로 도를 따르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데, 라고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모든 사람은 조상을 위한 지성을 드려야 한다는 얘길 할 때, 난 고향을 떠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지를 물었다. 그때도 그녀는, 질문은 내가 해야 하는데, 라고 말을 하며 힘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결론적으론 힘들어도 자신이 선택한 일은 가치 있다고 역설했다.

 처음에 화려해보였던 그녀는, 길을 잘못 든 작고 연약한 카나리아 같아 보였다.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다시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길 해주었다. 별 다른 대답이 없었다. 다만, 커피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수중에 돈이 없으며, 도를 전하는 대상이 사주는 걸 먹는다고 했다. 더 좋은 커피를 사주고 싶었지만, 자판기 커피 밖에 없는 도서관 매점이라 그나마 가장 비싼 350원짜리 자판기 카페라테를 뽑아주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를 포섭할 수 없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더 그 말을 했다.

“영혼이 참 맑아요.”

 난 그게 보여요?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도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고, 이제 가야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맑다는 말을 처음 들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거울을 닦고 봐도 내 눈은 그리 맑아 보이지 않는다. 내 영혼도 글쎄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 맑다는 말을 다시 한다면 난 전투태세를 취하며 이렇게 일갈할 것이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도를 아는 예쁜 그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영혼이 맑다고 말해 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의 도(道)라는 것은, 자신이 보는 모든 사람을 부정적인 마음이나 의심 없이 맑은 대상으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위해서 자기 마음의 눈을 날마다 닦고 있는 것일지도.

 그녀가 아직도 거리를 헤매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곳에 있든지 맑은 눈을 갖고 그녀가 추구하던 진짜 도를 이루었기 바란다.



P.S.

@kyunga님이 알려주신 마크다운을 좀 써 봤습니다. 한 번 해 봐야지, 해 봐야지 하다가 맘 먹고 써보니, 정돈된 느낌이 좋습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영감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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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맑기때문에 사람들을 맑게 보는것 같아요. 부디 행복하길!

네 아직까지 맑게 지냈으면 좋겠네요ㅎㅎ

멋진 글에 써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시간 계좌의 잔고...머리에 남는 멋진 표현이에요..!ㅎㅎ

경아님 덕에 스팀잇 거리가 깔끔해지고 있습니다ㅎㅎ 스팀잇의 조경사!^^

도를 아는 예쁜 누나, ㅎㅎ 글이 너무 재밌어서 후루룩 읽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첨에 '도를 아는 예쁜 누나'를 제목으로 하려고 했었어요ㅋㅋ 잼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으앜! 통했네요 ㅋㅋ저는 글 읽는 내내 무려 '350'짜리 커피를 얻어마신 예쁜 누나의 미모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미모는.. 물을 부어놓은 소중한 컵라면이 불어터질 때까지 열지 않을 정도?ㅋㅋ

simsim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onga0906님의 [잡담] 기나라 사람의 걱정

.../td> 0.002 314 10 kyslmate/td> 2018년06월05일 13시12분
0.058 317...

저는 그 판타지를 이루어보려고 해요~
지금이 그때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에게 맑음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판타지를 이루고 사시는 부러운 분!^^ 맑은 분들과 맑은 향기에 맘껏 취하시길요ㅎㅎ

참고로 저는 세번째 살인을 선택해서 보다가 어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좀 그러하다지만 유난히 졸렸습니다 어제는ㅜ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막내 스즈가 다리저는 아이로 나와서 반갑더군요.
리틀포레스트는 저는 그저 그랬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의구심이ㅜ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굴러다니던 탁한 영혼이라 그런지ㅜ 서울에서 밥먹을 돈도 없던 이이가 시골에 내려와서 갑자기 풍족해졌나? 저걸 다 어디서 구하고 어디서 마련해? 고모집이 있다지만 응응?? 시골을 너무 환상적으로 그리는거 아니야? 시골이라고 오면 두팔 벌려 다 환영하는 데인줄 아나? 시골에서 자라던 해맑지 못하던 영혼이라 끊임없이 몰입에 실패하다가 느닷없이 끝나버리더군요. 솔직히 저는 예쁘게 만든 컵케이크 같은 영화였어요. 죄송ㅜ 도를 믿으시는지 수도 없이 당해봤눈데, 그 예쁜누나는 참 안타깝네요. 실제로 그 소굴로 끌려가서 조상님께 정성드리고 절한다고 그날 알바비를 다 날렸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살인이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살인을 다룬 영화에서도 감독 특유의 여백이 존재하나봐요ㅎㅎ 몸이 피곤할 땐 세 번째 살인을 피하겠어요^^ㅋ
전 <리틀 포레스트>가 대단한 메시지를 전해준다거나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는 서사를 가졌다거나 하는 기대가 없었나봐요ㅎ 볼 때 그냥, 요새 뜨는 김태리가 나오는 시골 먹방 영화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저 역시 탁한 영혼인데, 탁한 영혼이 이런 말랑한 판타지 영화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군요. 북키퍼님처럼 쯧쯧하며 말이 되나~ 하거나, 저처럼 입을 헤벌리고 침흘리며 속아 넘어가거나요ㅋ 그래도 속는 편이 영화를 볼 때 만큼은 즐겁지요. 우리 북키퍼 언니 판타지 주사 좀 놔드려야겠어요.ㅎ
북키퍼님도 도를 따라가셨군요. 저보다 더 깊이! 또 하나의 공통 분모를 찾았네요ㅋㅋ

그러고보니 전 한번도 '도를 아세요?' 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네요 (....) 제 영혼은 맑지 않나봐요 ㅠㅠㅠ

보통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 접근하더라구요. 서울님은 늘 누군가와 함께 다니셨던거 아니었을까요?ㅎㅎ

잘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ㅎ

저는 바깥에서 이동할 때는 달리기로 가고, 45도 위의 하늘을 째려보고, 대중교통에서는 표정이 안좋습니다. 성격과 실리를 반영한 결과인데 아무튼 누구도 무언가를 권유하러 오진 않습니다.

소수점님은 도를 전하기 어려운 조건이군요ㅎ 도를 전하려면 우선 달리기가 빠르고, 달리면서 말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의 체력이 있어야 하겠네요ㅋ

저야 일부러 전략적으로 그러는거지만 한국사람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또는 과거의 안좋은 경험으로 완전히 죽상을 하고 다니는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략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내면을 그대로 드러냈을때 그 표정일테니까요.

fur2002ks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fur2002ks님의 즐거운 만남...(뻘짓 진행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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