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가오나시의 습격

in #kr5 years ago


<사진 출처 : Daum 영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후드 코트를 입고 밤마다 학교 기숙사를 나서 비밀 모임에 참여한다. 그들은 학교로 대표되는 틀에서 벗어나 위대한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요즘 등교해서 아침 독서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 교실에 혹시 ‘죽은 시인의 사회’ 비밀 결사대가 결성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커먼 롱패딩을 입고 어두운 바위처럼 몸을 웅크린 애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반 이상의 학생이 검은 롱패딩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만 하얗게 드러내고 앉아 있다. 쉬는 시간이 되어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가오나시가 생각난다.

 비밀 결사대로 지칭하기엔 롱패딩을 입은 학생들은 이미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초, 중, 고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학교들을 접수해버렸다. 등굣길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가오나시의 행렬이 이어진다. 작년부터 이어진 롱패딩 열풍은 겨울철 대한민국 교육 현장의 상징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이들은 왜 롱패딩을 입을까. 롱패딩을 착용한 우리 반 열댓 명의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

 “롱패딩에는 ‘나의 모습을 울타리로 감싸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판단 받지 않겠다는 저항의 정신’이 담겨있어요. 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해서 롱패딩을 입습니다.” 라고 말한 학생은 물론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면 그럴 듯한 사회학적 분석으로 확장할 수 있겠지만,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일 뿐이고 아이들의 실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다리까지 따뜻해서요.”

 “다들 입으니까요. 안 입으면 뭔가 뒤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요.”

 간혹 이런 대답도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사 왔어요.”


요즘은 모든 곳에 가오나시가 있다. (사진 출처: Daum영화)

 다리까지 따뜻하니까 입었다는 대답은 그냥 하는 말이다. 애초에 ‘다리까지 따뜻하기 위해서’ 롱패딩을 사야해! 라고 마음먹은 애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이미 갖고 있다. 내복이라든가. 진실에 가까운 대답은 두 번째 얘기다.

안 입으면 ‘뭔가’ 뒤떨어지는 것 같다.

 내 생각엔, 이 ‘뭔가’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다들 입으니까, 교복처럼 되어 버렸으니까, 안 입으면 뭔가 결핍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뭔가’에는 서로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이 어떠한가도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나만의 것’ 하나를 가진 것보다, 모두가 가진 하나를 갖지 못한 걸 주목하는 사회임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즉, 누군가가 가진 독특함보다, 결핍이 없는 상태를 더 높이 쳐준다는 얘기다.

 어떤 현상이든 단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에게 롱패딩은 ‘해방’의 의미가 크다. 막상 입어보면 따뜻하고 좋은 ‘롱패딩’을 이제야 입을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받았다고나 할까. 주위에 입는 사람이 없을 때 롱패딩을 입는 이들은 유난스럽다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농구 선수, 축구 선수들이나 입는 겨울철 아이템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근데 이제는 너나할 것 없이 입으니까 이 아이템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있다가도, 급히 동네 앞 마트를 가야 할 때 롱패딩 하나면 외출 준비를 끝낼 수 있는, 그 편의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

 어찌됐든 아이들의 롱패딩 착용 의도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기존의 체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죽은 시인들의 수도사 코트와는 상당한 거리감을 보인다. 오히려 반대로, 가오나시 세계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거대한 흐름에 섞이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커 보인다.

 웬만하면 (나쁜 의미로) 남보다 튀고 싶지 않고, 웬만하면 남들 하는 거 다 갖추고 평균적인 수준으로 보이고 싶은 한국인의 속성이, 등골브레이커를 거쳐 이어져 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작년, 유행의 초기에 나도 무난한 검은색 롱패딩을 하나 장만했다. 그때는 학급에 롱패딩을 입은 아이들이 둘 정도 있었다. 그 둘 중, 매일 나와 똑같은 롱패딩을 입고 오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의 롱패딩은 동네에서만 소비되었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학교에 입고 갈 수 없게 되었다. 또 하나의 가오나시로 그 세계에 녹아들지 않겠다는 내적인 저항 때문이다. 이 유행의 불꽃이 잦아들 때까지 내 롱패딩은 나의 사적인 영역에서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영감5.jpg

Sort:  

지난주 저희 애들도 롱패딩을 사줬어요~~
유행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매장에도 그 외에는 괜찮은 것이 없다 하더군요..

네 올 겨울은 더 춥다고 하는데, 보온엔 롱패딩만한 게 없지요. 잘 사주셨어요^^

롱패딩은 올해도 유효한가봅니다. 저도 작년에 하나, 올해 또 하나를 엄니 덕분에... 전 불편해서 별로 안 좋던데, 애들은 좋은 모양입니다.

ㅎ 중고등학생들은 많이 입더군요. 조선생님 교실에도 한가득이겠네요. 큰 움직임이 없는 애들은 불편함을 못느낄듯요ㅋ

큰 움직임이 있는 녀석들이 꼭 입어요 ㅋㅋ

ㅋㅋ 그런 아이러니가!ㅎ

우리나라에선 남들과 다른 나가 되어선 치뤄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니 남들과 달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입는 건 아닐까요

네 평균의, 일반의, 이런 말이 강조되는 사회니까요. 남들과 다른 걸 '보이는' 영역에서만 평가하는 문제도 있겠네요.ㅎ

초중고등학생 나이때는 소속감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니 무언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따라하는 것 같아요. 저는 노스페이스 패딩이 유행이었는데 요즘은 롱패딩이..! 문제는 유행하는 것들이 죄다 비싸다는거죠.
저도 개인적으로는 유행따라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기는한데, 롱패딩은 그래도 겨울에입으면 따뜻하니까 자주입고 다닌답니다.
글 잘봤어요!:)

Posted using Partiko iOS

네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는 등골 브레이커들이 소속감의 매개체가 된다는 건 불행이 아닐 수 없지요.
어렸을 적부터 겉으로 보이는 걸로 판단하는 문화를 체득한다는게 참 서글픈 현실이죠.
어쨌거나 따뜻한 롱패딩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닐 수 있어 좋긴해요ㅎ

롱패딩에서 죽은시인들의 사회 그리고 역설적으로 가오나시라니. 정말 솔메님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지. ^_^ 뜻밖의 가오나시

남들 하는 것 다 해보자는 집단주의 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또래 집단에게 유독 의지하고 큰 의미를 두는 10대의 성향 때문인지 한 없이 튀고싶어 관종이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렇게 모든 흔적을 지우기도 하고.

다만 입고싶다면 누가 입든 말든 눈치보지 말고 맘껏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어쨌든 추운 겨울에 롱패딩만한 게 없죠. 전 키가 작아 적당한 길이의 패딩도 이미 롱패딩의 역할을 한답니다. 후훗.

집단문화, 또래 집단성,, 다 10대의 호르몬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비싼 점퍼나 롱패딩으로 표출되는 현상은 한국 사회의 특성도 가미된 것 같구요ㅎ
튀고 싶지만 한편으론 남들과 같아 지려는 이율배반적인 특성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남들과 다르지 않는 토대 위에서 비로소 튀더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모순도 있으니, 그 영향도 있는 것 같구요. ^^

고물님은 롱패딩을 아주 오래전부터 입어오셨겠군요ㅎ 본의아니게 패션 선구자가 되셨던. ㅋ

근육질패딩의 유행을 생각해보면 내년 겨울부터는 롱패딩 코인에 대한 신규유입자가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롱패딩 가격이 떡락할 것이 예상됩니다. 3, 4년 간의 바닥다지기와 조정횡보기를 거친 후 4, 5년이 지나서 떡상하는 패턴이 예상됩니다.

저는 아마 그 때쯤 롱패딩을 구매하게 될 것 같네요. 지금도 여전히, 남의 롱패딩을 보고 궁시렁거리지는 않지만 '운동선수의 전유물'이므로 왠지 내게 어울리는 물건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탓입니다. 아마 다음 번 유행의 끝물에 물건을 사는 호구가 될 것만 같습니다.

ㅋㅋ 롱패딩 코인 전문가시군요.
제 생각엔 롱패딩은 한 번 유행이 꺾이면 아주 훅~ 가지 않을까 싶어요. 한창 유행했던 아웃도어의 길을 따르지 않을까 싶네요ㅎ

다음 번 유행엔 또다른 코인이 유행을 선도할 것이고 대구님은 이를 분석하시느라 또 구입을 미루실 거 같습니다. 영원한 패션 마이웨이의 냄새가 나는. ㅋ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닐텐데요. 다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건투하세요 ^^

ㅎㅎ 진정한 이해,, 참 쉽고도 어려운 말이죠. 감사합니다.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짱짱맨의 보팅현황은 보팅 자동화 서비스 스티머를 통해서 투명하게 공개됩니다.

https://steemer.app/jjm

감사합니다ㅎ

올해에는 더춥다하니 꼭 필요하죠

네 필수아이템입니다ㅎ

전 항상 겨울에 다리가 넘 추어서 불만이었어요.
근데 왠지 내복은 입기 싫고.ㅋㅋㅋㅋ 그래서 왜 패딩은 상의만 나오는 건지 항상 궁금해했었죠. 그렇다고 스키복을 입고 다닐 수도 없고.ㅋ
롱패딩이 유행처럼 되서 넘 좋았던 기억이.ㅎㅎ
교복은 싫지만 아주 비싼 교복이 되어버린 롱패딩을 입는 아이들. 아이들이 만드는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드는 거 같네요.

미동님에게 안성맞춤인 옷이었군요!^^ 다리에 추위를 많이 느끼시는ㅎㅎ
유행에 물타기하여 입고 다닐 수 있으니 참 편합니다.
교복도 스스로 고른 교복은 좋아하겠죠ㅎ

Coin Marketplace

STEEM 0.36
TRX 0.12
JST 0.039
BTC 70112.96
ETH 3549.99
USDT 1.00
SBD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