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방 이야기 #5

in #kr5 years ago (edited)

휘닉스 파크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난 후, 내 방에는 넉 장의 데크가 남아있었다. 매년 시즌이 끝나고 장비들을 정비하며 정리하자면 끝나버린 겨울 때문에 약간의 우울함과 함께 즐거웠던 시즌의 아련함이 서로 뒤섞이고는 했다. 게다가 아래의 사진을 찍던 때는 베트남에 가기로 마음먹고 난 후였으니, 아련함 아쉬움 같은 감정들이 더욱 진했었다.

2-1.jpg

사진 속 넉 장의 데크는 모두 전통적인 형태의 정캠버 데크로, 라이딩 한 우물만 팠던 내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컬렉션이다.

사진의 가장 우측에 있는 데크부터 보면.
선사 시대 유물급 데크로서 사진 찍을 당시 이미 제조일로부터 20년이 지난 상태였다. 엣지는 말할 것도 없고 캠버도 이미 심정지 상태에 들어간 데크였단 소리.

데크의 테두리에 둘러진 금속의 테를 엣지 edge 라 부르는데, 모든 형태의 턴에 사용되고, 정지 시에도 사용되는 데크의 핵심 파트 중 하나며, 캠버 camber 는 데크를 평평한 곳에 놓았을 때 아치형으로 위로 붕 뜬 부분을 말한다. 이 캠버가 살아 있어야 라이딩이 즐겁다. 보더가 데크에 체중을 실어 아래로 꾸욱 눌렀다가 힘을 풀면, 데크의 형태가 원상 복귀하면서 보더를 위로 밀어올린다.

3-1.jpg빨간색 바탕의 글씨가 각인된 부분 아래에 은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데크의 엣지다. 잘 관리된 데크의 엣지는 날카롭고 매끈하다.



이렇게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데크의 탄성이 보더에게 전달되면 다이내믹한 턴이 이루어지며 라이딩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즉 선사 시대 데크의 경우 엣지가 무뎌지고 캠버가 죽은 이후로는 타봤자 재미도 없는 데크였단 얘기며, 따라서 아주 가끔 박스나 레일등을 탈 때나 탔지, 거의 타는 일이 없었다.

주변에서 그냥 버리라는 말도 많이 들을 정도로 수명이 다 한 데크였는데, 내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데다, 생애 첫 데크의 의미마저 부여되어 있었기에 20년 동안 고이 품고 있었다.

4.jpgsource : pixabay

이 선사 시대 데크는 사실 충동적으로 구매했었다.
중딩 시절, 원래는 스키를 사려고 엄마 손잡은 채 백화점에 들렀는데, 스키 용품 섹션에 도착하자 매장 벽 높은 곳에 스노보드가 걸려 있었다. 한 번도 타 본적 없었지만, 어렸을 때 스케이트보드를 많이 탔으니 똑같이 타면 되겠지 싶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스키보다 보드가 더 멋있어 보였다. 엄마한테 보드로 사겠다 하니 탈 줄도 모르고,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어쩌고 저쩌고 숨도 쉬지 않으시며 한참 말씀이 많으셨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은가. 결국 부츠 신는 법, 바인딩 체결하는 법만 배우고 데크와 바인딩, 부츠를 싸 들고 집에 돌아왔다.

신날 대로 씬난 나는 며칠 후 친구들이랑 스키장에 가서 새 장비를 개시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용평 리조트의 대표적인 초급 슬로프 옐로를 내려오는 데 45분이 걸렸고, 45분 동안 최소 50번은 자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하품하며 내려오면 3분이나 걸릴까 싶은 길이의 슬로프지만, 당시에는 그 슬로프 위에서 무려 45분간 사투를 벌였던 것이다. 보호대도 없이 쌩으로 무릎과 엉덩이를 슬로프에 하염없이 꽂아대니 아파도 너무 아팠고, 초반에야 오기로 일어났을까 나중에는 와 이걸 내가 왜 샀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5.jpgpixabay 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진이 있길래 주워왔다. 아프냐. 사진만 봐도 아프다.



이상하게 도대체 턴이 되지가 않았는데, 당시에는 스키장에 보드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보더도 없었다. 나름 스케이트보드를 탔었고 깡은 좋았기에 활강으로 속도를 붙이는 것 까지는 문제없었으나 턴이 안됐다. 그렇게 첫 시즌에는 슬로프에 내리 꽂혀진 기억 밖에 없었고, 그다음 해에 들어서서야 어떤 형? 아저씨? 보더가 알려줘 처음으로 턴이라는 것을 해봤다. 숱하게 자빠지며 얻은 고통과 처음으로 세 번 연속 턴에 성공해 펄쩍 뛰며 소리 지르던 환희의 기억이 고스란히 내 첫 데크에 실려있다.

첫 데크 이후 제대로 된 데크를 사기까지는 참 오래 걸렸다.
학생 때야 장비가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고, 병역 공백기와 해외 체류 기간까지 더해져 새 장비를 들일 여유가 없었다. 해외에서 돌아오고서야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좀 생겼는데, 남는 시간을 스키장에서 보내다 보니 진지하게 라이딩을 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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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십니다. :)

20년도 더 된. ㅎㄷㄷㄷ
그시절에 보드를 살 정도면 꽤나 부유하셨겠습니다. ㅎㅎㅎ
저도 해외체류하다보니 데크를 구입할 수가 없었는데....ㅜㅜ 그러고 구입해볼까 했더니 태국으로......ㅜㅜ

저도 처음 탔을때 넘어지던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ㅎㅎㅎ 엉덩이 시렸는데 ㅋㅋㅋㅋㅋ

데크 한 장으로 몇 년을 버텼는데 부유라니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꽈당 넘어지는 거보다 엉덩이가 쪼개지면서 넘어지는 게 정말 너무 너무 아팠어요. 쪼개지면서 넘어지는 거 아실라나 모르겠네요.ㅠ 지옥이 보입니다. ~.~

엉덩이가 쪼개지면서 넘어지는건 어떻게 넘어지는건지...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사진은 아파보이지만 멋져보이네요ㅎ
오늘도 디클릭!

픽사베이에는 정말 멋진 사진이 많은 거 같아요.ㅎㅎ

대박사건!!

보드를 즐기는 그 느낌...

부럽습니다. ㅜ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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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보드로 트릭을 하셨었나요?
저는 그냥 스케이트보드를 주행용으로만 탔었는데...
별 차이 안난다고 해서 슬로프 한번 올라갔다가..
후...거짓말쟁이들...-ㅅ-
아픈 기억만 남아서 그 뒤로는 스키장 자체를 안가봤습니다...
트릭까지 하시던 분들이면 확실히 다를 것 같기는 하네요..

스케이트 보드로 타봤자 알리 밖에 못했었어요.ㅎㅎㅎ
저도 거의 주행용으로만 탔습니다. 사춘기 오면서 갑자기 키가 크는 바람에 자꾸 자빠져서 그만뒀더랬습니다.ㅠ

턴이 전혀 달라서 고생 너무 많이 했네요. ;ㅁ;

보호대도 없이 쌩으로 무릎과 엉덩이를 슬로프에 하염없이 꽂아대니 아파도 너무 아팠고, 초반에야 오기로 일어났을까 나중에는 와 이걸 내가 왜 샀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어허.. 이런 시간을 견뎌야 스키방 멤버가 될 수 있는거군요. 왠지 machellin님이라면 처음부터 잘 타셨을 것 같은데 말이죠. ㅎㅎ 다칠 수 있는 담력(?)과 끈기가 필요하군요.

정든 데크를 정리하며 사진찍으며 얼마나 아쉬움이 크셨을지- 베트남에 가시면서 사랑하는 겨울스포츠는 조금은 포기하셨겠어요.

턴 처음 하기 전 까지는 정말 정말 많이 다쳤어요.ㅎㅎㅎㅎ
그래서 보드 처음 탄다 그러면 강습을 꼭 받으라고... 권하고는 합니다. 제대로 배우면 정말 빨리 늘어요!ㅎㅎ 이제는 1년에 한 번 관광으로 다녀오고는 하네요. 예전처럼 빡세게 타지는 못하고 설렁 설렁 타면서 사진 찍고 그러고 놉니다.ㅎㅎ

디클릭 ♥ 사랑 함께 응원합니당~!
행복한 즐토 보내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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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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