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3)

in #kr6 years ago (edited)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3)


인기가 능력으로 칭송받고, 비호감이 무능으로 단죄됐다는 맹점에서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21세기 한국의 포털크러시와 비슷했다.

페리클레스가 실행에 옮긴 세 가지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축제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셋째는 배심원과 같이 공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일이었다. 귀족은 반발하고, 민중은 환영하는 정책 일색이었다. 플루타르코스가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그는 이 말을 써가며 페리클레스를 비판했을지도 모른다.

페리클레스가 대중영합적인 정책들을 불사한 것은 키몬과 겨루려면 민중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키몬은 엄청난 재산가였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을 페르시아 본토까지 추격해 소탕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의 한을 풀어준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런 키몬이 사재를 출연해 수많은 아테네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헐벗고 가난한 노인들에게는 옷가지를 나눠주며, 자기가 소유한 과수원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과일열매들까지 마음껏 따도록 했으니 페리클레스 입장에서는 비상한 특단의 대책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곳간을 개방한 키몬에 맞서서 페리클레스는 나라의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키몬이 아무리 부자였어도 아테네보다 부자일 리는 없었다. 키몬과 페리클레스의 퍼주기 경쟁에서 후자가 승리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키몬의 지지자들은 상원 즉 귀족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레오파고스에 주로 몰려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회의의 일원이 아니었다. 페리클레스는 측근인 에피알테스를 조종해 아레오파고스로부터 국정을 관할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들을 거의 전부 박탈했다. 에피알테스는 키몬을 도편추방하는 정치공작에도 앞장섰다. 키몬이 스파르타에 대해서는 온건하면서도 민중에 대해서는 강경하다는 것이 탄핵 사유였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거부이자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을 나라에서 내쫓아냈을 만큼 페리클레스의 세력은 막강했다.

도편추방을 당한 자는 10년 동안 아테네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허나 라케다이몬의 대군이 아테네를 공격해오자 키몬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최전선으로 나가 스파르타 사람들과 싸움으로써 조국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자 페리클레스의 부하들이 추방자임을 이유로 내세우며 키몬을 전열에서 강제로 끌어냈다.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몫까지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전투에서 가장 많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키몬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이 스파르타의 세작이라는 오명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게 하려고 목숨을 바쳤다. 키몬파의 헌신적 희생은 아테네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더욱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황은 억울하게 추방당한 역전의 용사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가일층 자극했다. 민심의 동향에 민감한 페리클레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즉시 키몬을 복권시켰다. 여기에는 키몬이 2백 척의 함선을 이끌고 페르시아 영토의 정복에 나선다는 단서조건이 달려 있었다.

혹자들에 따르면 키몬의 열성팬이자 페리클레스의 누나인 엘피니케가 동생을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고도 한다. 귀국한 키몬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평화협정을 이뤄내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스파르타가 귀족파인 키몬에게 우호적이었던 사실이 두 앙숙 국가 간의 협상 타결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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