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래의 인문학 강의 [002]: 우리 머릿속의 세 유령 1

in #kr6 years ago

[002] 들어가는 말 : 우리 머릿속의 세 유령 1

오래전 한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년의 가족들은 밤참을 해먹는 날이 많았어요. 그 재료는 지하창고에 있었고요. 심부름은 언제나 이 소년의 몫이었습니다. 지하창고에는 전깃불이 없어 어두웠어요. 플래쉬를 가지고 가야 했지요. 반지하라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있긴 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지하창고로 들어설 때 뒤에서 쾅 하고 문이 닫히면 가슴도 쾅쾅거렸습니다. 유령 이야기 때문이었어요. 한 살 많은 형은 심부름을 시키면서 늘 무서운 유령 이야기를 했습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지요. 지하창고로 내려가면 유령이 많았습니다. 플래쉬는 물건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지만 어두움 속에 사는 유령들을 깨어나게 했어요. 고개를 들면 여기저기에서 유령처럼 보이는 것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찾아서 후닥닥 뛰어나오곤 했습니다.

그날도 플래시를 들고 앞만 바라보며 사과상자로 돌진해서 사과를 꺼내 들고 퍼뜩 돌아섰습니다. 도망치듯 뛰어 나가려 했어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얼어붙어 버렸어요. 잠깐이었지만 긴 시간이었어요. 돌아볼까? 그냥 도망치듯 뛰어 내려갈까? 이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불쑥 든 거예요. 맞부딪쳐 보자.

돌아섰습니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솟구쳤겠지요. 모퉁이에서 사람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손을 흔드는 것 같았어요.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희미했지만 사람 모습이 분명했습니다. “누구세요?” 용기를 내어서 말했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는지도 모르죠. 다가가 보았습니다. 사람처럼 보이게 쌓여 있는 물건들이었어요. 좀 더 용기를 내어 어두운 지하창고를 구석구석 돌아다녔어요. 플래시로 비춰 하나하나 밝혀보면서. 어둠 속을 다 탐험하고 나니 지하창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는 울적할 때면 지하실에 내려가 어둠 속에 앉아 깊은 위로를 받기도 했어요. 알고 나니 친구가 되더군요.
세월이 많이 지나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우리 머릿속에는 세 종류의 유령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유령들에 대해 알고 나서 근본적인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고 인문학이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다들 그래서 생각에 문제가 생긴 거구나.


■ 아는 대로 보게 만드는 첫 번째 유령


뉴질랜드의 와나카Wanaka에 가면 <수수께끼 세상Puzzling World>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다음 사진은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기둥들입니다. 사진(이미지 1)을 봐 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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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다고요? 기둥 사이에 서 있는 유령을 보았군요! 못 보았다고요? 다시 한 번 보세요. 분명히 기둥과 기둥 사이에 사람 모습이 보일 겁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왜 저 빈 공간에서 사람을 볼까요?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찾아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웬만큼만 비슷하면 사람으로 느낍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지만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생존본능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겁니다.

특히 마음에 깊이 새긴 사람, 그리운 사람이나 무서운 사람이 생기면 착각하는 일이 더 잦습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걷다보면 길모퉁이에 서 있는 나무가 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아주 오래된 옛날에 불이 없어 캄캄했던 밤길에서 유령을 본 사람이 많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저 소년도 어두운 지하창고에 내려갈 때마다 무서운 유령을 떠올렸고 그림자들이 모두 유령처럼 보여서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러나 용기를 내어 플래쉬로 ‘밝혀 보니까’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두려움이 사라졌지요. 이처럼 대개의 경우 모르면 두렵지만 알고 나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고 나면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도 생기는 것이지요.

그나저나 우리에게는 왜 저런 착각이 자연스러운 걸까요?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해석을 보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을 갈 때마다 사진 속의 저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 보세요. 언제나 조금은 으스스할 겁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는 깜짝 놀랄지도 모르지요. 분명히 거기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머릿속에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보고 전달해주는 유령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긴 겁니다. 모르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아는 것만 보는 유령이 살고 있어요. 그 유령이 보이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고정관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게 알면 적게 보이고, 많이 알면 많이 보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나 독서량이 적은 사람과 대화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에는 없는 것이니까요. 더욱이 자기 머릿속에 이런 유령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유령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하고라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두 번째 유령”으로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C) 강창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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