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룸 23. <더 랍스터>, 사랑으로 관통하는 문명의 생태학(2)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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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room.23(film)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이해를 위해 리뷰를 읽고 보는 것도 권장합니다.
*글의 분량으로 인해 각 주제를 두 편에 나누어 게시합니다.


안락하지만 답답한 호텔의 이미지 사진 : 다음 영화 <더 랍스터>(2015)

2. 진정한 사랑은 서로에게 맞춰가는 것이다.


앞서 <더 랍스터>가 문명의 외연을 이미지로 탁월하게 치환해냈듯이,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개인의 영역도 '호텔'과 '숲', 두 영역을 중심으로 훌륭하게 묘사해낸다.

먼저 호텔은, 국가를 상징할때도 그러했듯 사랑을 표현할 때도 '안락'하지만 '답답'하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호텔의 특징은 모든 교류가 방문을 열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인은 모두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통점을 찾기 전에는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격식과 규칙, 룰이 존재하며,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그런 룰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 안에서의 모든 활동은 자유롭다.

사랑이 그렇지 않은가. 비록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들어가지 말아야할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고,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지켜야할 규칙, 막 사랑을 시작했을 때 지켜야할 규칙 등, 사랑의 진행에 따라 지켜져야 할 규칙도 있다. 설령 어떤 기막힌 공통점이 있어서 개인 영역을 ‘합방’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방 안에서조차 지켜야할 선이 있다. 데이비드가 냉혈한 여자와 커플이 되어 침대의 위치를 정하고 잠자는 방식을 정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도 결국 진심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다면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호텔에서 사랑을 구하는 이들은 대체로 ‘원하지도 않는데 살아가기 위해서’ 짝을 구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크게 갈구하지는 않지만 외롭기는 하니까 마지못해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진심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원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예비 대중’이기도한 호텔 투숙객들은 작은 공통점이라도 발견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들은 성격이나 취향 같은 내면의 기호가 아닌 외형적인 공통점만을 찾아 결합하곤 하는데, 심지어 데이비드의 친구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짝이 되기 위해 자해로 코피를 흘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서로의 사소한 외형적 공통점만을 쫓아 커플이 된 이들은 그들의 아이조차 자신들이 낳지 않고 호텔에서 제공받는다. 도시에서 살기 위한, 문명의 사랑이란 게 그런 것이다. 호텔에서 묘사되는 사랑은 각박한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안락함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가식을 써야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숲'속에서의 사랑은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사진 : 다음 영화 <더 랍스터>(2015)

그렇다면 숨 막히는 ‘문명의 사랑’이 아닌 ‘숲 속의 자유’는 어떤가? 애인도 없으니 죄책감 없이 마음껏 자위를 해도 되는, 모든 것이 내 취향과 내 선호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세상. 단지 개인의 취향을 공유할 뿐이므로 당연하지만 이들 세상은 여닫을 문조차 없다.

하지만 숲 속의 외톨이들은 단단한 나무뿌리를 배게 삼아 자고, 흙투성이의 땅에서 거친 식사를 하며 살아간다. 즉, 외톨이는 자유롭지만 불편하다. 더구나 단지 외형만 보고 판단하는 '문명의 사랑'에 질려 숲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이들은 필경 사랑의 환희를 갈망하게 되어있다. 마치 전편에서 외톨이들이 ‘문명의 규칙은 싫지만 문명은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아무리 마음이 크다고 해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외톨이들 역시 숲속에서 몰래 키스하거나 섹스하지만,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 끔찍한 형벌을 받아 고통에 신음한다. 사랑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게 된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 ‘피의 키스’ 형벌처럼, 그 대가는 밥을 먹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게 될 수 있고, 더 심한 형벌은 기본적인 생리욕구마저 해결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 같은 묘사는 준비되지 않은 사랑은 현실적인 삶의 요소를 앗아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놓고 보면 호텔 속 문명의 사랑은 진심이 아닌 가식적인 사랑이지만 안락한 삶을 작정했기에 그 생활을 그대로 영위(오히려 더 풍족해질 수 있는)하지만, 문명에 질식해 숲으로 도망친 외톨이들의 자유연애는 비록 그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는 있어도 삶의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걸 보여준다.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며 팍팍한 삶 속에서 사랑하려면 마음에도 없는 상대라도 만나야(아니, 그런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해야겠다) 겨우 이어갈까 말까 하지만, 일을 관두고 자신을 탐닉하는 와중에 사랑에 빠지면 현실의 곤궁에 처할 수 있다.


도시로 향하는 데이비드와 그녀 *사진 : 다음 영화 <더 랍스터>(2015)

결국 어딜가나 살곳이 없어보였던 문명의 생태계처럼, 사랑에 있어서도 나의 삶을 지키면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곳은 없단 말인가? 여기서도 장님이 된 애인을 따라 데이비드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눈을 찌른다는 건 외형을 잃는다는 말과 같다. 즉, 시각을 잃어 상대의 겉모습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도시'의 사랑은 오로지 외형적 공통점만을 요구한다. 허나 그들은 외형을 버린다. 다만 진심을 다할 뿐이다. 이상한 일이다, 문명의 한복판에서 진심어린 사랑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는 데이비드가 이기주의자의 표상인 숲의 보스를 살해하고 애인을 위해 눈을 찔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한다. 이를 해석하면 이기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 된다. 우리는 혹시 계산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외형만을 바라본 채 나는 이런 사람인데, 저 사람은 마땅하지 않다고.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수준이 차이날 거라고. 이기심은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결과적으로 사랑에 관한 한, <더 랍스터>는 외형보기를 그치고 상대의 마음에 집중해서 서로의 환경을 맞춰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 답답하고 각박한 ‘문명의 사랑' 속에서도 진심을 찾는 방법이라고.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해답은 없다. 각자의 마음에 달렸을 뿐.


*전편 보기
필룸 23. <더 랍스터>, 사랑으로 관통하는 문명의 생태학(1)


*작품 정보
제목 : 더 랍스터 / 118분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제작 : 아일랜드, 영국, 그리스, 프랑스, 네덜란드, 2015


본 리뷰는 '작가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미디어'
마나마인(https://www.manamine.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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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한 번 관람해보고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실 그냥 쭉 읽을까 했는데 목차를 보니 그냥 안 보고 읽기 좀 아쉽군요

포스팅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감상 후에 보는게 더 낫겠죠 ㅎㅎ
좋은 영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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