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photo] 골목길

in #kr6 years ago (edited)

June. 2018, Nexus 5x


비오는 날 골목길을 걷다가 넘실거리는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초록빛 잎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같이 환한 가로등에 잎들은 투명함이 제 본질인냥 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두 개의 태양과 무수한 달을 마주해야하는 나무의 생애를 생각했다. 낮에 뜨는 태양보다 밤에 뜨는 태양이 더 가깝고 더 밝다. 전기를 통해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개념을 나무가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나무가 아는지 모르는지에 관하여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의 측정과 같은 실험으로 치환되는 - 나무의 언어를 번역하는 작업에서, 결국 우리의 삶에 이런 작업들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다시 번역(Bruno Latour가 말한 개념을 잠깐 빌려온다.)까지 나아가는 작업을 상상한다.

빛을 받지 못하거나 빛이 닿지 못하게 되면,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대체로 검다. 검은 것도 색을 가지고 있을까.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참 신기하다. 빛을 받고 자신이 가진 고유의 진동수에 맞추어 다시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과정에서, 모든 빛을 흡수해버려 내어놓을 것이 없는 상태를 색으로서 지칭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림자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림자는 색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식에서 검은 색은 분명하게 색에 속한다.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나무 뒤 편으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또 하나의 무성한 잎과 가지를 본다. 그림자는 때때로 결여의 상징이지만, 이 때만큼은 아니다. 실루엣의 불연속적인 경계가 균일하게 존재를 그리고 있다.

이윽고 사진을 설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시각적 장면을 추구하는 사진은 결국 사진 너머의 프레임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고, 시각이 아닌 청각이나 후각, 촉각과 같은 것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상상의 여백은 결국 각자의 경험으로부터 채워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조립하기 위한 매뉴얼이나 각 부분의 정합성을 나타내는 설계도면과 같은 사진을 찍지 않는 이상, 완전하고 완벽한 정보의 전달만을 추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결국 사진의 해석은 모호할 수 밖에 없고 각자 이야기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서로의 맥락을 파악하여 더 가까운 (적절한) 거리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당신이 무얼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알아차린 것 같고, 내가 알아차린 바에 따라 당신의 메시지에 동의/공감/비공감/반대하고 싶다거나, 당신의 메시지를 (나의 맥락에 따라) 인정/수정/개선/보완/보류/삭제/거부하고 싶다." 정도의 평이, 우리가 각자에게 닿을 수 있는 최적의 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비단 사진에서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떠한 대화든, 어떠한 몸짓이든, 모호함의 여백은 결국 닿을 수 없는 각자의 경계를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내주기도 하는 역설적인 성질을 가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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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어도 그 피사체가 나무이거나ㅜ태양이거나 물이거나, qrwerq님의 글은 사색이 가득합니다 ㅎㅎ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사실은 사색'만' 가득한 글이 아니길 항상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피사체를 보고 주욱 적어내려가는게 제일 편한 방식의 쓰기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그런가봐요ㅎ

aha its amazing

내면을 다양하게 깊게 탐색을 하시네요^^

(다른 존재들에 비해) 그나마 가장 잘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ㅎ

모호함의 여백이 있고 해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갈등이나 분쟁도 발생하지만, 서로의 경계를 지켜준다는 점에서 모호함의 여백이 감사하게 느껴지네요. 서로의 속마음을 훤히 알 수 있다면 거기가 지옥일 것 같아요. 늘 해석의 여지와 다양한 가능성을 남기는 글들 감사합니다. ㅎ

찬찬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적을 때에 언제나 해석의 "여지"를 염두에 둡니다. 모호함이 각자의 맥락에 닿을 때 구체적으로 변화하는 새로운 맥락을 기대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경계를 지켜주는 모호함의 여백은 소중한 의미를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

아~~몰라요
글이 너무 멋져서 댓글 못 달아요
그냥 느낄래요
이건 최고의 찬사예요

과찬을 주셔서 제가 많이 부끄럽네요. 잘 닿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글을 적을 때에 마음 가는대로 적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의 글이 닿을 때에는 기분 좋음 이상의 감정이 드는 것 같습니다. :)

제 댓글도 제 이웃님인 승화님 댓글에 묻어가겠습니다. ^^;

제가 여쭤본 적이 있었나요? 직업이 어떻게 되시죠?
흠.. 글로 담아내는 사색의 깊이가 정말 남다릅니다.

소속이라고 부를 법한 것은 있지만, 사실 프리터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삶의 짦은 시기마다 하는 일이 상당히 불연속적으로 바뀌는 편이라 직업을 말씀드리기에는 쉽지 않네요. 특히나 밥벌이에
있어서는요. 다만 (최근에는) 무언가 적는 것이 주업이기는 합니다.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 글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찬찬히 보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림자 라는 하나의 현상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참 다양하네요.

빛을 막아선다.
그림자가 생긴다.

제게 그림자는 어떤 큰 힘에 대한 도전, 그 결과로 인한 흉터같은 느낌이에요.

사진을 보고 이해한다는 것도 어찌보면 이런 거겠죠. 누군가에게는 저렇고, 나에게는 이렇고, 다른 이에게는 그러한 의미. 모호함이 있을거라는 걸 전제하고 최소한의 교차점을 만들기 위한 설명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림자만 보더라도 각자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를 것이기에, 사진도 어쩌면 하나의 화두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전과 그 결과로서의 흉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를 담고 있군요.

모호함은 비언어적인 부분에서 조금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 "다른" 의미를 보는 것이 결국 교차점을 만드는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

어떠한 대화든, 어떠한 몸짓이든, 모호함의 여백은 결국 닿을 수 없는 각자의 경계를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내주기도 하는 역설적인 성질을 가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게 하는 문장이네요.
모호함의 여백이 소중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런가... 그럴수도... 그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모호함과 여백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긴 합니다. 어차피 단단히 경계가 맞물릴수 없다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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