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17. 프러포즈 받던 날

in #kr6 years ago (edited)

어젯밤 다른 분의 포스팅에서 라인가우(Rheingau)의 리즐링을 발견했다. 댓글을 달다 보니 친구 결혼식 참석차 갔던 독일 여행이 떠올랐고 6월 초였던 것 같은 기억에 사진을 찾아보니 마침 6월 6일이 결혼식 날이었다.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 생각해보니, 내가 프러포즈 받은 날이 그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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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과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와 나. 내 이름이 적혀 있던 예쁜 식탁.
식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였다. 깜짝 놀라게 해줄 일이 있다며 양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던 그를 보며 당연히 목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내 앞으로 오더니 급기야 무릎을 꿇고 말했다. "Will you marry me?"

3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일 욕심이 많았던 나는 그 당시 결혼 생각이 없었을뿐더러 우리는 결혼 자체를 논의한 적도 없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분위기상 받으면 영락없이 결혼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저 반지는 다이아인가?'
혼자 생각에 잠긴 나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고, 머쓱해진 그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뒤 테이블의 미국 남성이 갑자기 일어나서 얘기했다. "여기 이 커플이 지금 막 약혼했어요. 다 함께 축하해줍시다."
그렇게 우리는 레스토랑 안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축하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반지를 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더 이상 소화가 되지 않아 메인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모두 남긴 채 50유로의 팁을 주고 황급히 빠져나왔다.

독일의 결혼식은 마지막 손님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술을 마시며 파티를 한다. 마지막 손님 중 하나로 새벽 3시에 숙소에 돌아왔던 우리는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쌓인 피로, 어색해진 분위기와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또다시 마신 리즐링으로 인해 우리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결혼하자는 거야? 올해 당장 하자고?"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당장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을 한다면 나와 하고 싶다고. 우리가 외국의 고성(古城)에서 정장 입고 데이트할 날이 다시 올까 싶어서 준비했다고. 깜깜한 저녁,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에서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했는데 체크인 당시 저녁은 몇 시에 먹겠냐는 질문에 내가 6시 반이라고 대답해버려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6월의 독일은 밤 11시에 해가 지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에서처럼 눈물을 흘리며 "Yes! Yes!"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고 했다.
올해가 아니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편해진 나는 어제 궁금했던 반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거 다이아야?"
"아니."
프러포즈해야겠다는 생각이 여행 1주일 전쯤 들었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반지를 찾고 다이아몬드를 끼우려 했지만 2주는 필요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큐빅으로 가지고 왔다고, 결혼할 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겠다고 했다.

결국 결혼할 때 다이아몬드 반지는 사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님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은 채 결혼을 준비했다. 결혼식 날짜와 예식장을 정한 뒤 가족 소개를 위해 진행된 상견례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시어머니께서는 예단도 하지 말자고 말씀하셨다. 예단도 안 하는데 굳이 예물에 욕심내고 싶지 않아 반지는 보석하나 없는 커플링으로 마무리했다. 이 반지 중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버전이 있는데 커플링을 사던 날부터 결혼 10주년 선물로 노려왔다.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짧았던 독일 여행을 다녀온 후 긴 휴가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지만, 그 당시 상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일주일 이상의 휴가가 가고 싶다면 신혼여행으로 다녀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편은 이때다 싶었는지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결혼을 먼저 해야 한다고 나를 꾀었다. 결국 우리의 결혼 준비는 항공권을 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훗날 결혼이 확정되고 프러포즈 받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을 때, 소중한 마음을 그렇게 부술 수 있냐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3분만에 중대한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결혼이 결정된 후 프러포즈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날짜도 다 잡아놓고 이제와서 무슨 프러포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서로의 마음의 준비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방법도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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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순전히 신혼여행 때문이었다....

아니 너무 강조하시는 것 아닙니꽈?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그 이후 몇달간 고민을 해봤어요. "나는 결혼을 할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을 할 것인가?", "언제 할 것인가?". 첫번째 두번째 질문은 'Yes'였는데 언제 할 것인가가 어렵더라구요. 제가 이쯤되면 결혼해야지라고 원했던 나이와는 4년의 갭이 있어서요. 그런데 급 신혼여행에 넘어갔습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멋진 글에 이상한 댓글을 달아버렸습니다. 다시 한 번 송구... 흑흑

ㅋㅋㅋㅋㅋㅋㅋ 왠지 이 짤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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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걸렸... 아닙니다 아닙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칼 같으시네요

ㅍㅎㅎㅎㅎㅎㅎㅎ 예리함, 역시 벼린 칼이었어요!!!!!!!!!!!

글을 읽으며 3분의 시간동안 남편분은 떨리고 써니님은 당황 하셨겠다 생각도 했는데.
칼님 댓글에 빵 터지네요. ㅋㅋㅋ

ㅋㅋㅋㅋㅋ 저런식으로 공격하고 가실줄이야

ㅋㅋㅋㅋㅋ너무 빵 터졌네요.

와... 이걸 이제서야 읽었네요.
남편 분 진짜 용감하시네요. 50% 에 베팅도 하시고. 진짜 멋지심. 격하게 멋지다고 뒷북 치는 사람있다고 전해주세요. 꼭요.

ㅋㅋㅋ 전해드렸습니다.

저 3분간 남편분의 마음은 어땠을지... 다만 써니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래서 갑작스런 프로포즈는 안좋은 것인가..

평소때 그런 낌새를 보였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텐데, 게다가 제가 생각했던 시기보다 너무 앞서는 바람에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사귀자고 고백을 할 때도 뭔가 서로 잘 될것이라는 감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 처럼, 프로포즈도 그렇게 진행된다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남편 분이 교포신가요? 문맥상 외국분인것 같기도 한데 나중에 '시어머니'랑 '예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ㅎㅎ 외국에도 예단이라는 개념이 있다는걸 들어본적이 없네요.

미국 사람들은 프로포즈를 한 후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프로포즈를 하기 전에 짤막하게라도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너 결혼할 생각 있냐?). 남편분께서는 진정한 서프라이즈를 택하셨군요 ㅎㅎ 남편분께 빙의하여 읽어보니 감격하지 않는 fiancee를 보며 조금 섭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또 써니님의 속내를 읽으니 충분히 당황스러웠을것 같기도 하네요.

다이아의 문제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참 소란스럽고 어려운 문제인데 좋은 결정 잘 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구색을 갖추는 게 좋을수도 있으나 하나를 갖추면 또 갖출 것들이 있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남의 눈치보며 거기에 맞춰서 사는 느낌이 자꾸만 들어요.

역시 예사롭지 않은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

남편은 한국서 나고 자란 한국인인데 무슨 영화에 꽂힌건지, 외국이라 그랬는지 영어로 준비했더라구요. 덕분에 뒷 사람이 구해줄 수 있었긴 해요.
한국에서 친구들 보면 다이아를 선물 받아도 눈치보이고 아까워서 평소때 끼고 다니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안 샀는데, 외국 나와보니 모두들 큼지막하게 하나씩 끼고 다녀서 오히려 놀랐어요. 역시 결혼할 때의 다이아는 국적을 막론하고 이슈인가봐요.
하긴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가 괜히 나온 가사가 아닐듯도 하네요 :)

마지막 문장이 정곡을 찌릅니다 ㅋㅋㅋ (게다가 복수형!)

프로포즈는 평생을 두고 생각나는 아주 곱디고운 추억이지요! ㅎㅎㅎ

누구에게나 소중한 추억이지요. 어쩌다보니 저와 남편에겐 곱디 고운 시간만은 아니었지만요. 그래도 그 때 워낙 충격적이어서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어제 간만에 그 때 사진을 꺼내 봤는데 둘다 아직 앳된 얼굴이라 눈물이 ㅜㅜ

미국분이 귀엽습니다^^
미국분 덕분에 결혼을 빨리하게 되었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ㅋㅋㅋ 그 사람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얼음땡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럼에도 좋지 않으셔나요? ㅎㅎ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당일날은 정말 충격 받아서 갑자기 소화도 안되고 손이 벌벌 떨렸어요. 다음날 일어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보니깐 흐뭇하기도 하고 고민되기도 하고..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정이라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메모장에 열심히 적는 중... <(신혼)여행을 미끼로 프로포즈는 성공할 수 있다.> 응?

결혼 안하고 신혼여행만 갈 수는 없냐고 물어보긴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뭔 말인가 싶지만요 ㅋㅋㅋㅋㅋ

신혼여행이라면은... 결혼하고 가셔야지요. 결혼 안하고 여행은 언제든지 가실 수 있답니다. ^^

긴 여행은 못 가더라구요. 신혼여행도 비행시간까지 합쳐서 10박이었던. 저는 2주를 꿈 꿨는데 2주 쓰려면 추석에 가라고 하셔서...

저는 최소 1달간 신혼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사실 1달도 짧게 느껴집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힘들겠지요? ㅎㅎㅎ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트래킹도 좀 하고, 야영도 해보고 그러고 싶은데... 이래서 혼자 사나 봅니다. ㅋㅋㅋ

트래킹도 야영도 좋아하시는 분 만나시면 되죠!! 다만 그만큼의 휴가를 낼 수 있는 직장이.. 저도 아직 2주 이상의 여행은 못해봤어요. 혼자 가더라도 남편과 고양이를 두고 너무 오래가긴 미안하더라구요.

트래킹도 야영도 좋아하시는 분 만나시면 되죠!!

제 주변에서는 국내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더라고요. ㅎㅎㅎ 저 멀리 건너 건너 그런 분이 있다는 것을 전해 듣기는 하는 수준이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항상 이러고 있습니다. ^^

국내에서 웬만해서는 신혼여행 제외하고 장기 휴가는(앞뒤 붙인다해도 9일~10일) 힘들 것 같아요. ㅎㅎㅎ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요. ^^

ㅎㅎㅎㅎㅎ 뭐 그 맘을 쭉 갖고 계신다면 만나셨을 때 안 놓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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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현실적 아닌가요...ㅋㅋ
다이안지 아닌지 묻고, 긴 휴가 땜시 결혼을 생각하고... ㅎㅎ
중요한 것들을 사실 허무하게 결정하는 일이 다반사죠...ㅎㅎ
그 결혼 뒤늦게 축하드립니다..

ㅋㅋ 하지만 결국 다이아는 아직인걸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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