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제두 최고의 날

in #kr6 years ago

1975년 6월7일 고흥 장사 유제두 최고의 날

영조실록에 전라도 고흥 땅에는 장사가 많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라 끄트머리의 작은 고을 고흥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 장사(?)가 적잖이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우선 박치기의 제왕 프로레슬러 김일이 고흥 출신이고, 수원에서 자라나긴 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산소 탱크 박지성도 고흥에서 출생 신고를 했다. 그리고 국내 프로복싱 사상 최다 연속 KO 기록을 보유한 전 챔피언 백인철도 고흥이고, 도끼 주먹을 휘둘렀던 한국 중량급 복싱의 간판, 이름부터 고흥스러운(?) 박종팔도 고흥산이다. 그리고 하나 더 1975년 오늘 우리나라를 환호로 뒤덮었던 유제두도 고흥에서 자랐다.

유제두.jpg

유제두는 한국 복싱 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다. 샌드백을 두들기기 위해 넝마주이까지 해 가며 돈을 벌었던 노력파였고, 동양 타이틀을 21차례나 방어한 보기 드문 복서였고, 무려 10년이 넘는 선수 생활 동안 한계 체중을 꾸준히 유지했던 참으로 ‘독한’ 선수이기도 했다. 그 캐리어에 특징이 하나 있다면 그는 유독 일본에 강했다. 55전의 전적 가운데 30명이 넘는 일본 선수와 싸웠고, 대부분 KO로 때려눕혔다. 그가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당시의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도 일본의 와지마 고이찌였다. 별명은 불꽃의 사나이, 이미 세계 타이틀을 두 번씩이나 차지했고 그 끈질긴 스타일로 인해 "야마또 다마시"(일본 정신)의 체현이라 칭송받던 선수였다.

와지마는 무릎을 굽혔다가 펴면서 주먹을 날리는 '개구리 펀치'로 유명했고 그 변칙 스타일로 세계를 주물렀지만 난데없이 현해탄을 건너온 고흥 장사 유제두 앞에서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지고 말았다. 7라운드에 접어들어서 유제두는 와지마를 몇 번씩이나 다운시켰고 링사이드는 미친 듯이 환호하는 재일 교포들의 태극기로 뒤덮였다. 와지마는 ‘야마또 다마시’답게 벌떡 벌떡 일어났지만 도저히 유제두의 적수가 못됐다. 세계 챔피언 유제두. 홍수환이 멕시코의 KO왕 알폰소 사모라에게 맥없이 타이틀을 뺏긴 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 그 기쁨은 컸고, 더군다나 일본의 영웅을 곤죽내고 가져온 타이틀이라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유제두1.jpg

유제두는 2차 방어전에서 다시 와지마를 만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흥 장사 유제두가 초근목피의 아오지 인민처럼 흐느적거린 것이다. 그는 제대로 주먹을 내밀지도 못했다.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았고 어찌 어찌 버티다가 15라운드가 되었을 때 무참하게 경기를 포기하며 KO패한다. 평소의 유제두가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기였다. 막 TV가 보급되던 시절, 옆집 할머니가 그 경기를 보고 그 옆집의 할머니에게 애타게 물었다는 질문이 그 황당함을 말해 준다. "보소. 그 집 TV는 잘 나오덩교? 우리 집 TV에는 억수로 뚜들기 맞는기라예."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게 어떻게 유제두인가. 어떻게 그 팔팔하던 사람이 저렇게 흐느적거릴 수 있는가. 가장 완강하게 그 결과를 부인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유제두 본인이었다. 그 이후로도 동양 타이틀을 몇 번이나 더 지켰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유제두 자신이 그 경기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제두는 경기 당일 주먹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졌었다면서 약물 중독 의혹을 제기했고, 트레이너 김덕팔을 고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과는 무혐의였다. 사실 트레이너 김덕팔이 그런 일을 할 사람도 아니었다.

유제두2.jpg

하지만 유제두에게는 그날의 무기력은 평생의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훗날 유제두는 또 한 번의 약물 중독 주장을 제기한다. 이번에 지목한 용의자는 뜻밖에도 중앙정보부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후배에게서 중앙정보부가 자신에게 약물 공작을 폈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한다.

71년 동양 챔피언 시절 그는 동향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처음 인사를 갔고, 그 후 명절 때마다 DJ를 찾았는데 DJ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송곳니를 갈던 유신 정권이 눈에 가시같은 DJ와 친한 세계 챔피언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논리였다. 유제두에 따르면 문제의 후배가 그에게 "경기 전에 먹은 딸기에 장난을 쳤다고 합디다."라는 구체적인 귀띔까지 해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유제두는 계체량 이후 배를 채운 음식은 곰탕과 딸기였다.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유제두는 지금도 와지마와의 경기에서의 자신을 믿을 수 없어 하며, 자신이 약물 중독의 희생양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 진위를 가릴 길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겠다. 하지만 유제두가 동양챔피언이 된 1971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였다. 동양챔피언이라면 장안의 화제가 족히 되던 시절이었기에, 현직 대통령 턱 밑을 치고 들었던 야당 후보에게 인사를 가는 동양챔피언은 충분히 경계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그가 한창 동양 타이틀을 방어해 나갈 때 김대중은 일본에서 납치되어 국내로 끌려왔고 (1973), 유제두는 세계챔피언이 된 뒤에는(1975) 그 위험한(?) 김대중을 찾아가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었다.

이 당시 챔피언 유제두의 위상은 오늘날 슈퍼스타 두엇을 합친 것과 비슷했을진대, 과연 중앙정보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유제두의 ‘약물 중독’ 의혹을 패배자의 구차한 변명 또는 피해의식의 발산이라 무시해 버리기에는 우리 현대사가 너무나 음험하고 교묘했고 집요했다.

유제두가 동양 챔피언으로 줏가를 올리던 무렵, 김대중을 납치 공작의 총책임자였지만, 2007년 국가정보원의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결재를 확인하기 전까지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고 버텼고 납치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우기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재권 공사의 아들이 오늘날 북미 협상의 주역인 성김 이다. 어차피 그는 철저한 미국인일 뿐이지만, 지금도 어느 체육관에선가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는 유제두에게 그 소식이 다시 한 번 오래된 상처를 들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다른 잡다한 상념에 사로잡힘이 없이, 1975년 6월 7일 와지마 고이찌를 때려놉힌 후 환호하던 그 순간만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1
JST 0.033
BTC 63458.69
ETH 3084.37
USDT 1.00
SBD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