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 줘 속아 줘"

in #kr6 years ago

"속아 줘 속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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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를 할 때 숙원 아이템이 있었습니다. 안산 어딘가에 있다는 <00의 집> 이라는 곳이었죠. 전도사가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인데 재개발 때문이라던가 하여간 어떤 사연 때문에 터전을 옮겨야 하고 그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연을 장애인들이 돌리고 다녔습니다. 아마 이 말을 들으면 "어 나도 봤는데" 하는 분들 많을 겁니다 .

제보를 한 사람도 그랬습니다. "아니 뭐 하루에도 서너명이 이걸 돌리는데 이게 진짠가 해서요." 확인해 봤더니 안산에 같은 이름의 시설이 있긴 했지만 종교인 개인 아닌 꽤 건실한 종교 기관이 직영하는 곳이었고 '전도사님'과는 거리가 멀었고 앵벌이를 시킬 이유도 없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럼 가짜죠 언넘이 장애인 앵벌이를 시키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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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흘 동안 지하철만 계속 타 봤지만 실패했습니다. 놀러갈 때는 그렇게 쉽게 무릎 위에 놓이던 00의 집 쪽지를 눈을 씻고도 보이지 않았고 '00의 집' 장애인들도 눈에 띄지 않았지요. 그렇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알고 봤더니 다른 PD들도 그렇게 지하철 뻗치기를 했다고 합니다. 다들 실패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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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뒷얘기를 합니다. "아직도 '전도사님' 팔며 쪽지 돌리는 장애인들이 있던데..... 그 전도사 보고 싶은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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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영향 탓인지 지하철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그렇게 마음이 넉넉해지지는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정말 정말 불쌍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동전 털어 주거나 천원 짜리 주고, 단속 피해 물건 파는 행상들은 곧잘 사 주지만 '사지육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이러고 다니면 얄짤이 없습니다. 또 무슨 사연이 적힌 쪽지를 봐도 그리 관심 깊게는 보지 않습니다. 어차피 불쌍해 보이게 썼겠지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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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jpg

어제 아내와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데 한 깡마른 열 예닐곱쯤 된 여자애가 쪽지를 돌렸습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사람들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쪽지를 흘낏 보니 뭐 대충 그렇고 그런 사연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파 누워 있고 치료비는 없고 저는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닙니다. 동생은 학교에 보내야 하고..... 조금이라도 도와 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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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앉아 있는데 아내가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돈 좀 없어?"
"뭐 있지만....... 아 쟤 ? 에이고 뭐 진짠지 가짠지. 뒤에 언넘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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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용돈 주는 건 신안 왕소금이지만 누구 돕는 돈이라면 그리 아까워하지 않는 아내입니다. (그럼 자기가 주지 왜 내 돈을 묻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미스테리입니다.) 그래서 스마트폰 보며 여자애 무시하기는 글렀다 싶어서 뒤적뒤적 지갑을 꺼내는데 아내가 나직하게 얘기를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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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한테야 그 돈 있으나 없으나잖아. "
"그거야 그렇지."
"속으면 어때. 저렇게까지 하면서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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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마누라하고 말 섞어서 본전 건질 일은 없습니다. 지갑에는 마침 돈 천 원짜리 한 장이 달랑 남아 있었습니다. 그걸 꺼내 쥐는데 아내가 갑자기 혼잣말을 합니다. "미치겠네....... 더 없어?"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들다가 흠칫 놀랐습니다. 쪽지 돌리던 여자애가 (아 호칭이 애매합니다. 여학생은 아닌 거 같고 소녀라고 하기엔 크고 청소년은 너무 법적인 용어 같고)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겁니다 . 어깨를 가늘게 들썩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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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확 상했습니다. 울컥했다고나 할까요. 아내의 지갑에도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나온 건 5천원짜리 한 장과 동전들. (참 현금 안쓰는 부부... 솔직히 더 줄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천원짜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내리면서 쪽지 밑에 돈을 접어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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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좀 바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고픈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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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은 꿇지 마. 응? 무릎은 꿇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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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었겠지요. 그냥 나이 열 예닐곱 된 아이가 나처럼 무심한 세상을 향해 제 배든 남의 배든 채우기 위해 무릎을 꿇는 모습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 아이가 싫은 게 아니라 그 접힌 무릎이 싫었습니다. 또 역겨웠습니다. 그 아이가 역겨운 게 아니라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계단을 오르면서 아내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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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은 왜 꿇어 무릎을"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인가봅니다
"응 그 얘기 해 줬어."
"지하철에서 저런 사람 만나면 얼마라도 꼭 줘라. 자는 체 하지 말고. 스마트폰 보는 척하지 말고." 역시 아내는 남편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투시경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항합니다. 권력에 대한 저항은 남자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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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넘 배불릴까봐 그러지 뭐," 그리고 그러다가 또 본전을 못찾는 건 남자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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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넘 배부를 거 걱정보다 쟤 배고플 걱정 먼저 하는 게 맞을 거 같아. 속아 줘. 쟤네를 방치하는 국가 체제 욕하는 것도 좋은데 일단 먼저 속아 줘. 성경 좀 보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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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요즘 교회에서 감투를 쓰더니....... 악에게 지지 않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악을 이기는 것은 선함이어야 할 겁니다. 마냥 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셈속과 무관심을 포장하지 말라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 .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 악에 이기는 것이 아니고 악을 꾸짖는 것으로 악을 극복하지 못하듯, 작게나마 그리고 속아넘어갈망정, 선함을 보이는 것이,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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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오늘의 교훈. 그리고 개인적으로 외치는 오늘의 교훈입니다. "나는 장가 잘갔다."

장가잘갔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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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아내분이시네요. 그리고 산하님도 아내분이랑 똑같으신데요 뭐^^
저도 참 몇천원이 아까워서 그러는지... 아니면 진짜 배후의 인물을 배불리는게 싫어 그러는지... 아마도 전자겠지만 배푸는 일히 쉽지 않은데 산하님 보면서 많이 배워갑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에이 후자겠지요 ^^ 즐거운 휴일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아름다운 아내분이세요. 속아줘...네 저도 앞으로 그냥 속아줘야 겠습니다. 똑똑해서 안 속으면 뭐 얼마나 더 부자 되겠어요

네 저도 좀 속아 주려구요. 아내 말을 듣다 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댔으니

좋은 얘기네여
반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아주고^^

네 그렇게 속아주는 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고기를 주는 대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고기를 주는 것은 자립심을 꺾지만 그 사람은 당장 먹을 고기가 없으면 굶어 죽을텐데. 지하철 계단의 앵벌이를 보며 항상 생각하다 주머니 속의 동전 혹은 천원짜리 하나 던지며 '이건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다' 되뇌입니다.

아내분이 참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결혼 잘 하셨군요.

6월 20일에 술 좋아하시는 분들과 한 잔 하려고 합니다. 산하님이 들러 주신다면 빛나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https://open.kakao.com/o/gqOmiMH

ㅜㅜ 20일 선약이 있습니다 애 군대 갈 때라...... 초대 감사합니다.

나중에 저 방에 놀러 오시면 재미있을 거예요! 기자분도 두분 계시고. 시간 될 때 한번 들러 주세요!

읽어 내려가며
음....
그렇지!

에구에구

아유참

오호~~
하는데

마무리

나는 장가 잘갔다 ㅋㅋㅋ
감동이 조금은 사라지구 제가 좀더 인간적
이란 생각이 듭니다.
두분은 천사?

천사는 어림 근처에도 못가구요 ^^ 즐거운 휴일 되십시오

씁슬하네요ㅠ 좋은글 잘봤어요

팔로우~보팅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려요 ㅎㅎ

감사합니다... ^^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속고 속아주는 세상
너무 알려고하면 정 떨어져요 ㅋ

동의합니다.... 더해서 속아주지만은 말고... 혹 나쁜 놈 있으면 잡아내기도 하고 그러면 좋겠어요 ^^ 시민들은 속아 주고, 공권력은 잡아 주고

현명한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건 든든할 듯합니다. 서로서로 말이죠.

요즘 지하철에서 앵벌이는 잘 안보인다 싶었는데

이젠 아이가 무릎까지 꿇는다니 좀 뜨끔하네요.

저도 친구가 알바(?)갔더니 앵벌이업체(-_-;;)라더라는 경험담 듣고

그 일당값으로 술 얻어먹은 적이 있어서 이런거 절대 안믿었거든요..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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