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얼룩말

in #kr6 years ago

1999년 5월 11일 남산에 얼룩말 출현

1999년 5월 11일 늦은 밤, 나는 편안히 집 소파에 몸을 묻고 TV를 보고 있었다. <PD수첩>에서 방송하는 "목자님 우리 목자님" 편을 보기 위해서였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뜬다는 풍설 자자한 목사의 감춰진 속살을 파헤친다는데 이 아니 흥미진진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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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교회측에서 방송금지 가처분을 걸어 방송이 한 주 연기된 데다, 방송 당일날 "일부 삭제 후 방송" 판결이 나와서 문제의 부분을 들어내기 위해 손가락에서 탄내나도록 재편집을 하고 있다는 전언을 들은 것이 몇 시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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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무슨 내용이길래 교회 관계자들이 그토록 눈을 뒤집고 덤벼들었을까? 과연 촬영은 어떻게 했을까? 등등의 궁금증은 나를 "닥치고 본방 사수" 대열에 가담케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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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손에 땀을 쥐고 바른 자세로 시청하고 있던 중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처음에는 내 손을 의심했다. 리모콘을 잘못 눌러서 다른 채널로 넘겼나 싶었던 것이다. 한창 만민중앙교회를 훑고 있던 모니터 속에서 난데없는 얼룩말이 뛰어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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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화면조차 안정적이지 못했다. 대략 80년대쯤 틀었던 <동물의 왕국>인 듯, 퀴퀴하고 빛바랜 화면이었고 그나마도 자주 끊겼다. 방송사고라는 직감이 왔다. 급하게 편집했다더니 테잎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혹시? 몇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던졌다.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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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당신이 거길 왜 가냐고 어이가 없어 했고 다음 날 나의 심야 출동담을 들은 동료들도 고개를 저으며 이상한 놈이라고 혀를 내밀었지만, 어쩌랴 호기심 하나만큼은 판도라 이상으로 강력하여, 일단 궁금한 것은 반드시 내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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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앞에 택시를 내린 순간 나는 사태를 직감했다. 끝 모를 버스들의 대열이 MBC 앞을 그득 채우고 있었고, 찬송가 소리는 요란하게 밤하늘을 갈랐다. 로비는 이미 신도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하릴없이 경비만 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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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사고의 원인은 명백했다. 방송에 항의하는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MBC에 난입, 주조정실을 찾아 방송을 중단시키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자 전파를 중계하는 남산 송출소 직원들이 긴급히 대체 화면을 내보냈는데 그 주인공이 <동물의 왕국>의 단골 출연자 얼룩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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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은 들떠 있었다. 몇 명을 붙잡고 어떤 사태가 일어난 것인지, 지금 심경은 어떤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상기된 어조로 하나같이 "승리했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 자신이 '구역장'이라고 밝힌 쉰 넘은 신사의 말은 웃음이 나올만큼 엉뚱했지만 함부로 내색을 못할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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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방송을 중단시킨 적이 없답니다. 아까 부목사님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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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뭣 때문에 얼룩말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뜨악하게 되묻는 내게 그는 열렬하게 두 팔을 휘두르면서 대답했다. "저절로 중단됐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누구도 방송 (주조정)실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는 이런 이를 두고 미쳤다고 하는구나 싶었다. 그때껏 광증(狂症)을 지닌 분들을 제대로 대해 본 적이 없던 나였으나 이후 <긴급출동 SOS 24>를 하면서 다년간에 걸쳐 온전치 않은 분들을 만난 경험을 종합해 볼 때, 그날 그 순간의 느낌이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희게 번쩍이는 눈. 확신에 찬 목소리. 단호한 손짓. 그리고 자신의 망상을 믿어 주지 않는 이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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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PD도 방송 모니터를 하면서 덜덜 떨었을 것이다. 방송사는 국가 주요 시설물이다. 쿠데타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병력이 방송사를 완전 접수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터인데 일개 교회 신도들이 어떻게 귀신같이 주조정실을 알아내어 기습(?)하고 방송을 중단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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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방송사 내부의 제 5열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방송사를 점거했던 신도들 가운데에는 경찰서 정보과 형사도 끼어 있었고 퇴직한 MBC 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무서운 집단이었다니.

뿐만아니라 담당 PD는 누군가로부터 미행을 당하는 등 적잖은 압박을 경험했고, 한 번은 방송 이후 계속 자신의 집 주위를 배회하던 이로부터 "뭐 저는 만민교회 사람이지만 PD님을 존경(?)합니다." 라고 하는 소름 돋을 일도 칭찬(?)도 들어야 했다고 한다.

PD들 사이에서는 '웬만하면 종교 아이템은 피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템의 호오를 떠나 그 후폭풍이 너무나 거센 탓이고 웬만한 강심장으로서는 배겨내기 어려운 일들을 즐겨 겪게 되기 때문이다. <PD수첩>이 1999년 5월 11일 겪은 바와 같이.

<PD수첩>은 오랫 동안 내가 맡았던 고발 프로그램과의 동시간대 경쟁 상대였다. 하지만 우리는 술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우리 프로그램은 있어서 유익한 프로그램이지만 <PD수첩>은 있어야 되는 프로그램이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그들이라면 가릴 것 없이 무서운 것 없이 어디든 쑤시고 다닐 것 같은 프로그램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PD수첩>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칼 아래에서든 광신도의 광기 앞에서든 주눅들지 않고 버티던 <PD수첩>은 많은 이들의 영웅이었고 '남산의 얼룩말'은 그 영광스런 상처의 하나였다.

그러나 최근 9년동안 PD수첩은 그 의로운 독기를 잃어버렸고 자신의 손으로 그 독니를 빼버린 이가 1999년 만민중앙교회와 맞섰던 그 PD라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였다. 이제 다시 힘을 찾은 PD수첩의 건승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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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는 콩밥은 장히 먹어야 할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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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방송중에 재미있는 일이 많았죠~
뉴스중에 난입해서 "내 귀에 도청장치 있다~"
라고 외치던 놈도 기억나네요~ ㅋㅋㅋ

그 얘기도 언젠가 해 드리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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