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빛나라

in #kr6 years ago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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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방송은 지방에서 오히려 잘 잡혔습니다. 서울 지역은 방해전파로 선명하지 않았던 반면, 부산 쪽에서는 FM 라디오로도 별로 부담없이 들을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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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의 인기가요" 끝나고 "김세원(이선영)의 영화음악실" 마무리된 뒤 잠자리에 들까말까 하던 중고딩시절, 갑자기 라디오에서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오면 재미삼아 북한 방송을 듣곤 했습니다. "광주인민봉기"와 "아웅산 조작 테러 사건"에 대한 '해설'은 색다른 재미였고 "당과 수령님 따라 천만리" 노래는 "이런 미친 놈들" 하며 낄낄거리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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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북한 노래는 유치찬란에 단순무식의 수령님 만세 일색이었는데 어느 날 분위기가 다른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습니다. 웅장하면서도 귀에 쉽게 박히는 멜로디, 언뜻 가사에 수령님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 듯한 신선함. 다음날 아버지에게 여쭤 보았습니다. 어제 라디오에서 흘낏 들었는데 혹시 이런 북한 노래 아시느냐. 마지막이 '길이 받드세'로 끝나는 거 같다는. 초등학교를 북한에서 다니다가 흥남 부두에서 피난 나오신 아버지는 당시의 북한 노래는 꽤 알고 계셨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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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버지는 싱겁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북한 국가다. 이북놈들이 국가는 꽤 잘 만들었지. " 그러면서 흥얼흥얼 완창을 해 주셨습니다. 지겹게 부른 노래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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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억대로라면 이 노래는 해방 몇년 뒤에 보급됐고 처음에는 북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군이 북진해 올 때 주민들이 능숙하게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올드랭사인 곡에 맞춰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 국가 역시 제목이 <애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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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두환이 아프리카 순방할 때 순방국 중 하나인 가봉에서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이 엄숙하게 서 있고 가봉 군악대가 국가 연주를 하는 타임이었습니다. 음악이 장중하게 흐르는데 전두환의 얼굴이 흙빛이 됐고 장세동 경호실장이 달려나가 가봉 군악대장의 팔을 쳐서 지휘봉을 떨어뜨렸습니다. 가봉 군악대가 연주한 음악은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아니라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로 시작되는 북한 애국가 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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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펄펄 뛰었고 그냥 가봉을 떠 버리자고 난리를 쳤습니다. 오늘날 우리 승합차의 대명사가 된 '봉고'의 이름을 탄생시킨 가봉의 봉고 대통령은 정중히 이 결례를 사과했고 군악대장을 파면시키며 유감을 표해 전두환을 가라앉혔죠. 그때 잘렸던 군악대장은 이렇게 말하며 툴툴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메르뜨 (제기랄) 남이고 북이고 대충 알아들을 것이지, 에이 빌어먹을 코리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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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오랫 동안 이 노래는 금기였고 금단이었고 금지였고 금역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월드컵 예선에서 남북대결이라도 할 때에는 중계 시간을 늦춰서라도 이 노래를 듣지 못하게 했고 북한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우리 선수가 은메달을 땄다면 절대 시상식은 중계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들어서서 한국에서는 그 금기가 상당 부분 풀려 국제 대회에서는 스스럼없이 울려퍼지고 있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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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이었던가 남북 여자 축구 대결이 상암에서 펼쳐졌을 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상암 경기장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연주되는 북한 애국가를 들으며 기묘한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옛날 당신이 가르쳐 준 기억을 까먹으시고 눈을 부라리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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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빨갱이 노래는 어디서 다 배웠냐. 하여간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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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북미 정상회담 뉴스를 뚫어보라 지켜보며 문득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노래는 참 좋습니다. 가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수령님 따위 흔적도 없습니다. 국가주의적 요소야 있지만우리 애국가에 비해서는 오히려 농도가 엷지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다스리는 '조선'을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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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는 걸지 않겠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일 테죠. 그러나 가사 적어 보는 거까지는 인공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선 날, 무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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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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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산의 아침이 항상 빛나기를. 삼천리 늘상 아름답기를. 반만년을 넘어 만년 역사 이어지기를.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인민의 슬기 넘쳐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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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몸과 맘 다바쳐 평화로운 나라 이뤄 가기를. 통일 되면 좋고 안되도 무방하지만 어쨌든 두 나라 다 일단 평화롭고 번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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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세계 군인 체육대회에 출전한 북한여자축구선수들의 국가 연주 장면

북한여자축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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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역시 제 생각에 점점 확신을 실어주시는군요..

종북 간첩이든지, 북의 대남 공작 부서 출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다스리는 '조선'을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 봅니다."

북의
폭압 노예화 통치 3대 세습 일가 독재 정권이
영원하기를 기원하시면서,

좋은 이미지를 북 백두크셔에 갖다 붙이는
공작을 수행하시는 것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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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드는 다른 생각은

수구초심..

역시 인간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지 않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하나의 일관된 논조를 제공해 주셔서,
준비하고 있는 제 글의
논리를 강화해 주는 사례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다스리는 '조선'을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 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주 심각한 내용을 의미하는 문장이군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다스리는 '조선'을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 봅니다."

그가 다스리는 '북조선' 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는 '조선' 이라니,

역시 백두크셔 일가의 북한에 대한 노예화 지배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남한까지 적화하여, "그가 다시르는 '조선' 을 생각.. 노래를 흥얼거리며.. "

역시, 종북 간첩에 점점 더 확신이 실립니다.

(아버님도 남한에 계시다고 하니, 북의 대남 해킹 여론 공작 부대는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요..)

삼천리 반만년 아름다운 강산 몸과 맘 바쳐.. 익숙한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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