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떠나다

in #kr5 years ago

1964년 1월 13일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 가인 김병로의 기일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물으면 백이면 백 이승만이라 답할 것이다. 하지만 초대 대법원장의 이름을 물었을 때 정확히 답할 이는 반도 안 될 거라 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 모두 "선거로 왕을 뽑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던가. 상식 삼아 알아 두자. 우리 나라 초대 대법원장은 가인 김병로라는 분이다.

존칭 생략하고, 김병로는 나라가 연일 기울어가던 1887년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가 빨랐던 목포에 가서 신학문에 전념하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을 만나 크게 분노하여 최익현의 의병에 동참, 일본 기관 공격에 앞장선 열혈 청년이기도 했다.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늦깎이 유학 (당시로서는)을 떠났고 스물 여덟에 메이지 대학 등에서 법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지만 대한제국은 이미 지구상에 없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일제 치하 '시국 사건 담당' 변호사로서 맹활약을 펼쳤던, 요즘으로 치면 '열혈 인권 변호사'쯤 될 유명한 3인방이 있었는데 그 셋은 바로 이인, 허헌, 그리고 김병로였다. 그들 '인권변호사 트리오'는 1923년 ‘형사공동변호연구회’를 결성한 이래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 2차 의열단 사건, 흥사단 사건 등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 관련이나 기타 '불령선인'들이 연루된 굵직한 사건들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6.10 만세, 신간회, 안창호 등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사건에 이르기까지 좌와 우가 없는 '닥치고 변호'였다고나 할까.

특히 김병로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소작쟁의나 백정들의 문제, 원산총파업 등 인간으로서, 노동자, 농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당한 이들의 문제였다. 전라도 서남해 바닷가의 섬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부터 개마고원 자락의 함경남도 고원의 농민들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김병로는 팔도가 좁다 하고 돌아다녔고 1929년 1월 일어난 원산 총파업 때에도 현장으로 출동하여 노동자들을 도왔다. 그래서일까 그의 호는 거리의 사람, 가인(街人)이었다. 충청도 옥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재판에서 김병로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한다.

"조선 민중에 관한 형사재판을 보면 태반이 정치범이고 사상범이니, 이는 근본적으로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먼저 경찰이 폭압하고 다음에 형사재판에 부쳐 해결하고자 하니, 뒤집어 생각하면 민중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경찰이다! 수백 명의 농민들이 장재성(소작쟁의 지도자)를 주재소에서 데려 왔는데 그 중에 몇 십 명에게만 죄를 묻는다니 무슨 제비라도 뽑아서 죄를 주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기나긴 일제 시대가 가고 해방이 왔다. 하지만 뒤이어 분단이 들이닥쳤다. 일제 시대의 인권변호사 트리오도 갈라진다. 이인은 남쪽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이 되고, 허헌은 북한을 택한다. 김병로는 남쪽에 남아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수장이 된다. 김병로의 무게는 해방 전과 후가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장 김병로는 헌법의 가치를 수시로 짓밟았던 행정부 수반 이승만에 견결하게 맞섰으며 사법적 정의를 통해 행정부의 오만과 횡포를 견제했던 것이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버스째 납치한 뒤 개헌을 통과시켰던)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은 그 허다한 일례의 하나일 뿐이었다. 연이은 법원의 무죄 판결에 약이 바싹 오른 이승만이 볼멘소리를 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라"고 맞받은 에피소드는 가인의 위상을 말해주는 한 단면일 뿐이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김병로는 부인 등 가족을 채 챙기지도 못하고 피난을 가야 했는데 인공 치하에서 그 부인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이 열 셋에 장가들어 반세기를 함께 한 아내가 빨갱이들의 손에 죽은 것이다. 즉 한때 좌익 사상범들의 변호사였을망정 김병로는 좌익에 대한 유감이 누구에 비해서든 적을 사람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발악적 만행을 방임하여 시일을 지연한다면, 시기의 장단은 있을망정 우리 인류는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라고 한 것도 김병로였다. 그런데 그러하던 그가 초지일관 폐지하라고 외친 법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이었다.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을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고려를 해 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벌에 있어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형법으로도 충분한데 왜 특수한 법률을 차고 앉아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아내를 잃은 대법원장이, 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1953년 4월에 한 발언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대법원장의 법 정신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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