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in #kr6 years ago

1981년 10월 4일 은하철도 999 첫방송

<긴급출동 SOS 24> 를 처음 방송할 때 일입니다. 여자 성우는 대충 결정이 됐는데 남자 성우는 누구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했어요. 한 명의 입에서 김기현 성우의 이름이 나왔고 저는 그때부터 무조건 김기현!으로 밀어부칩니다. 그 나직하면서도 파워 있는 목소리가 우리가 하는 프로그램같은 하드보일드에 어울린다는 이유였지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한 번 실물로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 이유는 그분이 바로 <은하철도 999>의 차장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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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만한 키에 얼굴 없이 동그란 빛 두 개로 눈을 대신한 채 "철이씨 철이씨! 어서 타요!"를 부르짖던 그 차장의 목소리가 바로 김기현씨였거든요. 그분을 처음 만나 인사하는데 그 말씀을 드리니 허허 웃으시면서 철이씨 철이씨를 한 번 리바이벌해 주시는데 나이 30대 후반의 PD는 그냥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안정효의 소설 제목대로 '헐리우드 키드 세대'라면 우리 세대는 재패니메이션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린보이, 이겨라 승리호 날아라 태극호로 동심을 키우고 마징가 제트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그렌다이저로 우주에 대한 로망을 배우고 미래소년 코난에서 산업사회의 어두운 면을 배우고 요술공주 밍키에서 여자 벗은 몸을 훔쳐 봤던 세대 아니겠습니까. 그 가운데 <은하철도 999>는 그 가운데에서도 굵은 발자취를 남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첫방송이 1981년 10월 4일 MBC 를 통해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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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시간은 일요일 여덟시. 원래 일요일만큼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꼬마들이 벌떡 일어나 TV가 있는 안방으로 기어들어 부모들의 일요일 아침잠을 들부수게 했고 아홉시 주일학교 예배 참석자가 급감하여 전도사님들을 걱정케 했던 <은하철도 999>가 시작된 겁니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무척이나 심오하고 어른들도 진중히 들여다보아야 이해될 메시지를 깔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개념도 그렇고 은하철도 999가 머무는 별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 사연들은 어린아이들로서는 사실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도 많았죠. 하지만 러시아 모자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한 메텔에 혹해서, 또 끊일 듯 끊이지 않고 무한궤도를 달려가는 은하철도 999의 기적 소리에 중독되어 꼬마들은 TV 앞을 사수했었지요. 그리고 김국환씨가 부른 주제가는 또 얼마나 멋있었는지.

대학 때 "버스가 횡단보도 지나서 고대 앞에 닿으면 술 취한 고대생이 버스에 올라타네 자리뺏긴 할머니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자리 뺏긴 운전사의 가슴엔 야마가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시내버스 333 시내버스 333"이라고 깔깔대고 노래해던 노가바는 바로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였지요. 그런데 이 주제가는 기실 90퍼센트 일본 것과 유사합니다. 옛 딴지일보 기사에 따르면 원래 방송 초반 주제가는 이 일본판이 아닌 독창적인 가사와 멜로디를 지닌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본편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어린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노래지요.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핑핑 원을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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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기적소리에 눈물마저 메마르고
찬바람에 별빛마저 흐느끼네
엄마 사랑찾는 그리움에
무정한 기차는 무정한 기차는 흐느껴 우네
말좀해다오 은하철도야 내 갈곳이 어디냐
말좀해다오 은하철도야 은하철도야

"말 좀 해 다오 은하철도야 내 갈 곳이 어디냐" 울부짖듯 하는 가사에 무한궤도를 달리는 은하철도들의 그림이 얹어졌는데 어른들이 동네 평상에서 술 먹고 부르던 "타향살이 몇 해더냐 목 메어 불러 봐도"나 "천리타향 낯선 거리 외로운 발길....."의 정서가 이해될만큼 가슴이 찡해 오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얼마나 넓은가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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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작을 제작했던 일본인들도 감탄했다는 이 주제가는 밀려나고 맙니다. 원인은 MBC였죠. MBC는 이 노래가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 쾌활한 느낌의 원 주제곡의 표절곡이 5회 이후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로 정해집니다. 정작 떨궈 놓고 보니 아까왔던지 MBC는 이 노래를 자주 자주 프로그램 중반에 삽입하고 저처럼 예민한(?) 꼬마들의 정서를 자극했었죠.

'엄마 잃은 소년'을 엄마처럼 또는 연인처럼 감싸던 메텔에 대해서 이성적 연민을 품었던 건 아마 저 뿐이 아니었을 겁니다. 메텔이 그 검은 옷을 벗고 거의 나신을 드러낸 회차가 방송된 다음 날 온통 메텔 얘기로 그득했던 학교 분위기가 기억에 새롭습니다. 철이가 추구했던 영원한 생명이 결국은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었고 메텔의 어머니는 이런 철이를 죽이려 하지만 딸 메텔은 탈옥을 감행하면서까지 철이를 도왔고 메텔의 어머니는 철이에 의해 용광로에 떨어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메슘을 떠나기 직전 메텔은 철이에게 갑작스런 키스를 감행합니다. 그때 철이의 옥떨메같은 얼굴은 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르죠. 아마 그때 그 만화를 봤던 수백만의 소년들 역시 철이가 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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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텔은 철이와 같은 은하철도 999를 타지 않고 다른 열차에 올라타서 다른 소년과의 여행을 선택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철이는 메텔을 부르며 울부짖습니다. 메텔 메텔 메텔. 아 그때 첫사랑을 잃은 것은 철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연휴 때마다 방송된 특별판(극장판인지도 모르겠는데) 은하철도 999 가운데 '화석화개스구름'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편이 있습니다. 어떤 별에 전 생명체를 석고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화석화개스구름이 덮치는데 그때 그 별을 관측하던 우주비행사였던 한 남자만이 화석화를 면합니다. 그에게는 예쁜 연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우주의 비너스같은 미인 석고 조각처럼 굳어지죠. 그때 우주의 해적들은 이 아름다운 화석(?)을 빼돌리려 하고 남자는 칼을 휘두르며 (여기서 일본 냄새가 팍팍 나긴 하지만) 그에 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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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와중에 깊은 상처를 입는데 때마침 또 화석화개스구름이 다가오죠. 예의 차장이 "철이씨 빨리!"를 부르짖는 가운데 철이는 가까스로 은하철도에 올라타지만 남자는 한때 연인이었던 화석 옆에 누워 손을 잡고 화석화개스구름을 기쁘게 기다립니다. 둘은 그렇게 영원히 화석으로 그 별에 남게 되었죠. 그 두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던 모습 또한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 그리고 흐르는 노래 "외로운 기적 소리에 눈물마저 메마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때 쫑났던 기나긴 애니메이션. 푸르른 동심이 풋사과같은 사춘기 감성으로 전화되던 시기에 함께 했던 은하철도 999. 이 글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 고개 끄덕이는 분들 꽤 되실 겁니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가 1981년 10월 4일 MBC에서 첫 방송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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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어렸을적 보던 만화였는데 임팩트가 강했는지
아직도 노래가 기억이 납니다.
재밌게 봤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죠? ^^

초딩 때 정말 재밌게봤는데 말이죠ㅎㅎ
오프닝곡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ㅋㅋㅋ

김국환 아저씨의 열창이 참 기억에 생생한

초등학교때 너무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오랜만에 예전 추억이 떠오르네요~

사실은 초딩에겐 좀 어려울 수 있었는데... 그렇게 재밌게 봤어요 우리 모두 ㅋ

어린시절 추억을 소환해주셨군요. 마지막편을 못봤는데 극장판으로 나온걸로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아 마지막회는 보셨어야 합니다.

어렸을적에 참열심히보았죠 ㅎㅎ

아주 아주 열심히 봤죠 ㅋ

저 또한 같은 재패니메이션을 주로 보았다 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어린 친구들은 잘 알지 못하더군요. 어쩌면 아저씨들만이 추억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좋은 공감을 얻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5시부터나 6시부터 한 시간 가량은 만화와 인형극 타임이었죠...

정말 향수자극확실한 주제입니다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

까마득한 기억 중에 기억나는 건 화석화 개스구름 편과 뚱뚱보들이 사는 별, 그리고 평행우주이론이가로 철이와 똑같이 생긴 잘생긴 철이가 등장하는 씬입니다. 어제 일도 기억을 못하는데 그런건 어찌 생각이 이해불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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