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ing in the Rain' 진 켈리 안녕히

in #kr5 years ago

1996년 2월 2일 진 켈리의 마지막 날

영화 레미제라블의 돌풍이 떠오릅니다. 2012년 대선 후의 힐링 영화다 뭐다 해서 많이들 봤고 또 잘된 영화기도 하죠. 엑스맨에서 황당한 액션 펼치던 휴 잭맨의 목소리가 그렇게 구성질 줄은 미처 몰랐었고, 출연 배우들 모두 현장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걸 제외하면 솔직히 뮤지컬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동받고 싶어서 감동받으려 애썼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어릴 적 제 정서를 자극했던 여러 뮤지컬 영화들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 거였습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쓴 안정효 작가에 비하면 그 발톱의 때도 과분하지만 나름 명화극장 토요명화 키드로서 가끔 틀어주는 뮤지컬 영화는 놓치지 않고 봤더랬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왕과 나, 마이 페어 레이디 ,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올리버! 등등. 그런데 이 무수한 뮤지컬 영화 가운데 클래식으로 꼽히는 두 영화가 있습니다.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사랑은 비를 타고’지요. 장대비 속에서 사랑을 얻은 기쁨으로 충만한 채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던 남자의 모습은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 가벼운 발동작과 부드러운 몸짓, 노래도 노래지만 그 몸의 움직임으로 관객들의 넋을 잃게 했던 그 명장면 말입니다.

그 남자 주인공이 진 켈리였습니다. 그는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노래와 춤은 물론 연출과 영상 구성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죠. 춤에 관한한 프레디 아스테아 같은 절정고수도 있었지만 (영화 <키다리아저씨>의 그 아저씨 역할입죠) 일단 귀족적 풍모가 가득한 프레디 아스테어의 정통 무도와는 달리 진 켈리의 동작은 뭔가 좀 가볍고 코믹해서 오히려 더 친숙했었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려서부터 무용을 배웠지만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며 자신의 길을 가던 진 켈리가 춤의 세계로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대공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동생과 함께 예능 경연 대회에도 나가고 하면서 그 타고난 재질이 바나나 껍질 벗듯 속살을 드러낸 거지요.

그를 영화계의 전설로 만든 <사랑은 비를 타고>는 참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싸구려 음악가였다가 스턴트맨이 되고 어찌 어찌 헐리우드의 스타가 된 돈이라는 사람과 배우 지망생이면서 나이트클럽 무희로 생계를 잇는 캐시의 만남, 그런데 그 시기는 영화계에 하나의 혁명이 대두하고 있었을 때였죠. 즉 무성영화의 시대가 거하고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못하는 게 없는 돈에게야 유성영화의 등장이 문제가 안되었지만, 오랫 동안 호흡을 맞춰 왔으면서도 결코 좋아하지는 않는 파트너 리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였죠. 최지우의 ‘실땅님’이나 권상우의 혀 짧음과는 차원이 다른,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을 수준의.

돈은 리나의 목소리를 캐시가 더빙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는 대박이 납니다. 하지만 캐시를 못마땅해하는 리나는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고 캐시를 어떤 역에도 캐스팅하지 말고 자신의 대역만 맡기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붕어 뻐끔 연기는 돈에 의해 들통이 나고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캐시가 대중 앞에 드러나면서 리나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캐시와 돈의 사랑은 깊어지게 되죠.

위풍당당하고 오만하게 헐리웃 최고 스타의 자리를 누리며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부리던 대스타 리나가 하루아침에 그 실체를 드러내고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장면은 무성영화 배우들 일반에 대한 폄하 같아서 좀 그랬지만, 또 어찌 보면 리나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자신의 배우적 권력을 이용하여 캐시의 목소리를 착취하고 있었고 그 장면은 거짓에 대한 진실의, 부와 권세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진 켈리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장막을 걷어 올려 리나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캐시의 진실을 밝혔듯,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때 그 광기를 고발하는 행동을 단행하게 되지요.

뮤지컬 영화의 고전 <오즈의 마법사>의 주연 주디 갈란드, 춤의 영역에서 자신과 쌍벽을 이룬 프레디 아스테아와 함께 진 켈리는 매카시즘 반대의 목소리를 열렬하게 토해 냅니다. “헌법과 인권이 반미행동조사위원회에 의해 망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일어설 때입니다.” 주디 갈란드도 이렇게 외쳤다지요. “미국의 양심이 심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발언해 주세요. 반미행동조사위원회가 인권을 짓밟고 있는 이 현실에 당신이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보여 주세요.” 그들의 분노 역시 비를 타고 흘렀고 무지개 저편 너머 (Over the rainbow)의 그들의 이상, 미국인들의 정의가 뭉개지는 것에 떨쳐 일어났던 겁니다.

그 후로도 진 켈리는 오래 살았습니다. 개인적 불행과 마약 사용 등으로 얼룩진 끝에 단명한 주디 갈란드와는 달리 진 켈리는 가끔 인종차별 반대 등을 표방하는 사회활동을 하면서 대통령의 훈장을 비롯한 여러 상훈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영광된 순간은 1994년 미국 월드컵 기념 공연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이 세 명의 세기의 테너들이 한데 모여 “Singing in the rain"을 열창했고 나이 여든 둘의 진 켈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예술가로서 배우로서 아마 그 이상의 영광과 기쁨도 드물었을 겁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2월 2일 진 켈리는 세상과 이별을 고합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와 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무대로 울리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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