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위기는 반복되지만 그 모습은 늘 다르다

in #kr5 years ago

072172572c57f4233fb82b8c8676c165.jpg
※본 글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정과 평화가 있으면 불안정과 위기도 함께 존재한다. 유사이래 인류의 발자취는 전쟁과 평화의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흐름은 깨지지 않는 법칙이었다. 다만 그 위기와 평화가 발현되는 모습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정복전쟁의 시대에서는 군사갈등으로 위기와 평화가 나타났으며, 서구 중세시대에서는 종교갈등으로 그 모습이 구현되었다. 따라서 위기에 대한 해결방식도 각각 군사와 종교를 중심으로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스럽게 이 군사와 종교라는 중심축이 자본, 좀 더 쉽게 말해서 돈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위기와 평화도 돈으로 귀결되는 것은 뻔한 이야기지만, 자본주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흥미로운 폭탄을 첨가했다. 바로 금융이라는 폭탄이다.

폭탄이 인간의 육체로 해결할 수 없는 작업을 한 번에 해결해주지만 잘못 터지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금융도 같은 역할을 한다. 빚으로 미래를 담보하여 호황을 이끌 때는 정직하게 빚 없이 살아갈 때보다 더 큰 수익의 파급효과를 가져다주지만, 그 장밋빛 미래가 어둠으로 확인되는 순간 반대로 절망의 도미노효과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혹자는 빚을 내지 말고 정직하게 살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냐고 말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빚을 권장하는 시스템을 없애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현재시스템상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다. 왜일까?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내용에 그 답이 숨겨져 있다.


위기에 당하는 자
<국가부도의 날>은 시놉시스에도 나와있지만 IMF직전의 상황을 다룬 영화다. 그런 위기상황 속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가장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은 IMF 사태의 피해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극 중에서 이 역할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갑수(허준호)다. 믿었던 사람과 현금거래가 아닌 어음거래로 대형 백화점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는데, 알고 보니 그 믿었던 사람은 회사의 위기를 떠넘기기 위해 갑수와 거래했던 것이다. 결국 IMF사태가 터지고 갑수와 거래했던 사람의 회사는 부도처리되어 어음은 종이조각이 되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갑수에게 전가된다.

이윽고 갑수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동생 시헌에게 대출자리를 알아봐달라는 장면이 비춰진다. 빚을 빚으로 갚아야만 하는 상황이 고스란히 연출된 것이다. 수억 원의 돈을 정직하게 일해서 갚을 상황은 자본주의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한편 그의 와이프는 IMF의 노동유연화 명령으로 계약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20년 후, 갑수는 자본주의 피라미드에서 또 다른 괴물이 되어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갑수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장성한 그의 아들에게도 사람은 아무도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리고는 핫싼에게 빨리 일 안 하냐고 호되게 꾸짖는 장면이 연출된다. 20년 전, 그의 공장 직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잘해주려 노력했던 모습을 상기해보면 참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IMF체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은 이렇게 한 사람의 성격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도 한다.


위기에 배팅하는 자
그런가 하면 들이닥칠 위기를 감지하고 위기에 배팅하는 윤종학(유아인)이라는 사람도 존재한다. 위기를 감지하고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자 그의 직장상사는 그를 ‘엄머론자’라 말하며 퇴사를 에둘러 만류한다. 그러나 그는 ‘엄머론자가 아니고 음모론자 입니다!’라고 유쾌하게 말하며 회사를 깨끗이 정리한 뒤, 국가위기에 역배팅할 계획을 치밀히 세운다.

극 중에서 윤종학은 그 어떤 인물보다도 입체적인 인물로 나온다. 자신과 함께 역배팅할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해 치밀하게 자료를 조사하지만, 막상 설명회 자리에서는 굉장히 감정적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하려 한다. 또한 자신이 이 위기에 역배팅하면서 얻는 수익이 누구의 돈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입장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자주 연출된다. 예컨대 설마했던 경제위기가 실제로 터지고 나서 그와 함께 역배팅에 걸었던 투자자가 ‘씨발 우린 이제 부자야!!’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그 투자자의 뺨을 때리면서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말라며 일갈하는 반면, ‘지금이 자신의 인생과 신분이 바뀔 기회’라며 더 큰 배팅을 준비하는 모순적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 모습은 IMF체제가 굳혀진 후에도 반복적으로 연출된다. 역배팅에 성공한 투자자들과 함께 축하 술자리를 할 때 밝게 웃는 투자자들과는 달리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밖으로 나와서는 미소를 한가득 머금는다. 이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다룬 다른 영화 <빅 쇼트>에서 그와 비슷한 포지션에 있던 마크 바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크 바움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는 금융기관에 혼쭐을 내주고자 역배팅을 가져갔지만,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물량을 청산하는 것을 주저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청산해서 얻을 수익은 딱 그만큼의 대중들의 피해가 담겨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물론 결국 청산했다는 점에서는 윤종학과 같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기를 이용하는 자
IMF사태의 원인을 정부가 알고 있었는데도 일부러 그런 것이냐, 아니면 관료 중에 금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르고 당한 것이냐를 두고 이야기가 많다. 본 영화에서는 아무래도 전자에 초점을 맞춘듯하다. 극 중 재정부 차관(조우진)이 IMF사태 직전에 외환보유고가 바닥날 것이라는 것을 인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이를 이용하는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출신에 철저히 기득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는 이번 국가부도 사태를 윤종학처럼 절호의 찬스로 여긴다. 다만 윤종학에게 있어 국가부도가 신분상승을 위한 장치였다면, 재정부 차관에게는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유지하기 위한 명분으로써 작용한다. 실제로 IMF체제로 인해 시장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며 권력의 집중화가 심화됐으니, 그의 계획은 성공한 셈이다.

물론 20년 후에 IMF사태의 전말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여전히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화려한 인물로 살아간다. 하긴 반독점 정서 때문에 기업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다는 미국도 2008년 금융위기의 주범들을 솜방망이 처벌하고 그들을 국가의 요직에 다시 앉혔는데 한국의 경우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재정부 차관과 측근들이 다음 위기에 대한 음모를 은밀히 꾸미는 것으로 그를 마지막으로 조명한다.

위기를 막으려는 자
그래도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현상을 목격하면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가끔 그것을 막아보려는 무모한 사람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한시헌(김혜수)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이미 엎질러진 물에 IMF체제라도 막아보겠다며 여러 대안을 제시해보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재정부 차관의 벽 앞에 가로막히고 만다. 결국 그는 끝내 IMF체제를 막지 못한다.

특이한 점은 갑수와는 달리 20년 후에도 변하지 않고 다음 위기를 막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도 가끔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대개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위기는 반복되지만 그 모습은 늘 다르다
이제 영화내용 바깥의 이야기에 대한 느낌을 간단히 풀어보고자 한다. 개봉 이후의 구체적인 흐름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 예매율의 추이로 봤을 때 <국가부도의 날>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연배우들의 명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최근 경제의 상황이 경제위기를 연상케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부도의 날>에 대한 관심은 과거의 사례를 통해 오늘날을 비추어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엇에서 경제위기의 공포를 체감하고 있는 것일까.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본인들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몸소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능적 위기감에 대한 단서는 영화 맨 마지막에 제공된다. 바로 가계부채와 부동산 문제다.

그중에서 먼저 부채이야기부터 해보자. 부채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관통하는 요소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성장해온 존재이다. 그만큼 빚은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잘만 활용한다면 미래가치를 끌어 쓰는 개념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사업을 할 때 자금을 융통하거나, 당장 돈이 없을 때 부채를 활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런데 현대 금융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이 부채가 교묘하게 커가기 시작한다. 본래 자본주의에서는 신용창조라고 해서 은행이 대출과 지급준비율을 활용하여 없는 돈을 장부상에서 키워나가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것이 금융자본주의 아래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나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부채의 긍정적 측면으로 인해 성장도 기하급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장밋빛 미래가 예상됐으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더 큰 성장을 위해 갑작스럽게 규제를 완화하고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저금리 기조를 형성한 것이다. 이것이 1990년대 미국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부동산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금융기관에 빗장이 갑작스럽게 풀리자, 은행들은 수익창출을 위해 부동산담보대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대출을 그냥 내준 것이 아니라 수익극대화를 위해 그 담보대출을 묶어서 파생상품을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투자자들에게도 이 새로운 파생상품은 부동산을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위험성도 비교적 낮고, 파생의 특성상 높은 수익률도 보장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런데 너무 인기있는 나머지 더 이상 부동산담보대출을 묶을 대상이 없어 파생상품이 동이 나게 될 위기에 직면한다. 그래서 결국 은행들은 신용등급이 낮은 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에게도 빚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굉장히 위험한 발상인 것이 느껴지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알았다 하더라도 한 번 맛을 본 순간 그 위험성을 새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처음 몇 년은 이 장사가 굉장히 성황리에 이루어져서 거대한 대출규모와 함께 갭투자 열풍이 불었다. 서브프라임 담보대출을 받은 돈으로 부동산을 사고, 또 다시 그 부동산으로 담보를 잡아서 다른 부동산을 사는 극단적 전략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거품에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시장이 금리인상 기조로 돌아서자 어느 순간 촉발되었던 사건이 바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다. 빚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때는 연쇄적으로 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으나, 그에 대한 부작용은 완전히 반대로 일어난 것이다. 극단적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들어가거나 신용에 취약한 개인들이 먼저 무너지자, 그들을 담보로 잡은 파생상품을 구매한 투자자들도 망하게 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은행과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말았다. 이렇듯 2008년 금융위기는 우리에게 부채를 건전하게 활용할 것과 부동산 제도의 재정립을 주문하고 갔다.

그리고 올해는 2008년 금융위기로부터 십여 년, IMF사태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해다. 지난 위기에서 던져졌던 메시지를 잘 기억하고 경계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체감경기는 그렇지 않은듯하다. 언론에서는 부채의 크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말한다. 이는 통화량이 장기적으로 늘어야만 하는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이치이지만, 문제는 가계부채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부채가 긍정적 파급효과를 일으킬 때는 위에서 아래로 시작되지만, 부정적 파급효과를 일으킬 때는 아래에서 위로 시작된다는 점을 상기해보았을 때, 이는 좋지 않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부동산의 경우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점들이 있다. 부동산에 거품이 꼈다고 하기에는 아직 본격적인 인구감소기까지 시간이 남은 상태이며, 1인 가구의 증가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미국이 실시한 양적완화때문에 실물에 비해 화폐의 가치가 낮아진 상태다. 다시 말해 지난 십 년간 시중에 풀린 돈이 많아서 그 돈이 정처를 헤매고 있는데, 그중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부동산에 투자공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동산 가격상승은 현재만 놓고 보았을 때 비합리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앞으로의 상황이다. 십 년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저금리 기조로 일관했던 미국이 올해부터 금리인상의 칼을 빼어든 것이다. 금리인상은 시중에 풀었던 돈을 다시 거둬들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부동산 시장의 변화도 주목해야 할 점 중 하나다. 현대의 모든 경제위기에는 부동산이 항상 한 축을 담당해왔다.

다만 글의 맨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위기의 본질은 늘 같지만 발현되는 방식은 그때마다 다르다. 1970년대에는 그 모습이 오일쇼크로 나타났고, 1980년대에는 블랙 먼데이로 기억되는 주가 폭락으로, 1990년대에는 아시아 금융위기, 2000년대에는 미국&유럽발 금융위기로 각자 다르게 발현됐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식으로 그 위기가 발현될까.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지는 난민행렬, 기상이변의 증가, 미국과 중국간의 패권다툼, 금리인상의 시작, 십 년간의 양적완화에 따른 통화건전성의 악화, 다시 불거진 제도권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빈부격차의 심화, 4차산업의 등장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의 공존, 아직 미숙하지만 암호화폐라는 새로운 유동성 자산의 등장.

도사리고 있는 위기의 징후들은 곳곳에서 보이지만 그것이 터지지는 않게끔 묘하게 유지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바로 2018년이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감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 건 영화 속에서 윤종학이 투자자들에게 강조한 ‘信(믿을 신)’의 유지 여부에 따라 변화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화폐와 금융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부터 경제위기는 재현될 것이다. 신뢰가 깨질만한 비정상적인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갖춰져야 할 시기이다.

Sort:  

늦었지만,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감사합니다 :)

Coin Marketplace

STEEM 0.24
TRX 0.11
JST 0.032
BTC 62482.14
ETH 3044.68
USDT 1.00
SBD 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