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ljy19님의 <미래 내 자녀에 대한 소망>을 읽고

in #kr6 years ago (edited)

오늘 좀 한가해서 잉여력을 발휘하여 스팀잇 이곳저곳 탐방 중이다. 산책하다가 구구절절 참 공감이 가는 글이 보여 덧글을 달다가 글이 길어져서 하나의 글로 완성해 본다. @admljy19님의 미래 내 자녀에 대한 소망을 읽고 든 생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물(커피 or 술)장사만큼이나 투자 대비 이윤이 많이 남는 가성비 좋은 장사인 것 같다. 나 또한 @admljy19님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게, 평촌이었나 범계였나 아무튼 그 일대를 저녁 10시~11시 사이에 지나게 됐는데 대로의 한쪽 두 개 차선을 학원 차량들이 점령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워낙 생경했던 풍경이라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됐는데, 그 일대가 강남 부럽지 않은 사교육의 메카임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고군분투하여 사회에서 제발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게 된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여기 자세히 밝히긴 그렇지만, 난 차상위 계층에 위치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차상위 계층이라 함은 아마도 기초수급 대상인 분들보다야 조금 형편이 낫겠지만, 사회경제적 지위 상에서 거의 바닥에 가까운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회경제적 사다리의 밑바닥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으며 고군분투하여 여기까지 왔다.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동네 보습 학원 정도를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1인가 2때까지 다녔고, 과외는 꼬꼬마 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영어 공부를 잠깐 했던 것을 제외하면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내가 꾸준히 다녔던 동네 보습 학원도 사실 아버지 고향 친구의 후배가 하던 곳이라 아마 돈을 거의 안 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교육적 백그라운드를 지니다 보니 차선을 두 개나 점령한 학원차들의 행렬이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듣고 예습이나 복습 같은 것은 하지 않더라도 시험 일주일 전부터 바짝 공부하기만 하면 그래도 전교 상위권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가 서울에서 제일 공부를 못 하기로 유명한 동네 가운데 하나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올라 가면서부터, 정확히 고2 무렵부터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약간 버겁게 느껴졌다. 벼락치기가 먹히지 않는 과목들이 있었는데, 수학이 특히 그랬다. 결국 난 수포자가 됐고, 대입에서도 수학을 보지 않는 과를 지원하여 합격하게 된다.


고2 때까지 사실 어떤 대학이나 어떤 과를 가야할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부모님은 대학 근처에도 가보지 못 한 분들이라 가이드를 해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한 가이드라고는 세 살 터울의 누나였는데, 누나가 그 흔한 학원이나 과외 한 번 받지 않고 쉽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저 막연하게 '나도 곧 있으면 대학에 가겠구나' 생각했을 따름이다. 정말 현실성이 없었다.

고2 때까지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생각없이 살았나 싶다. 당시에 smashing pumpkins를 위시한 얼터너티브 락밴드에 심취한 상태로 늦은 저녁까지 냅스터라는 P2P에 접속하여 mp3 수집에 몰두하였고, 결국 my bloody valentine, yo la tengo 같은 당시 한국에서 백 명이나 알았을까 싶은 마이너한 밴드에 꽂혀서 '엄마 나 밴드할래. 베이스가 내 길인 것 같아!'라고 징징징 떼를 쓰며 어머니의 속을 긁어놓기도 했다. 어머니가 당시에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다행히 고3 때 정신을 좀 차리고 모의고사 문제집이란 걸 풀기 시작했다. 남들이 다 공부하는데 나만 미친놈처럼 밴드하겠다고 설쳐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로 밴드가 절박하진 않았고, 방향성이랄 만한 게 뚜렷하지 못 했다. 대학을 안 가면 왠지 인생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불현듯 내게도 엄습해 왔다. 참 빨리도 왔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들으면서 무슨 스팀잇 레벨업하듯이 차곡차곡 문제집을 쌓아나갔고, 당연하게도 지원했던 모든 대학에서 낙방하여 재수를 하게 된다. 재수 때도 전략이라고는 1도 없이(수학 점수를 안 보는 과가 있다는 것을 몰라서 오르지 않는 수학에 매진했다) 3월부터 6월까지 하루 8시간씩 공부하고, 그마저도 7월부터 수능 때까지는 완전히 손을 놓게 된다. 300원 내는 지역사회 청소년 공부방에 가서 까뮈나 카프카 같은 소설가의 소설책 독파에 열을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억세게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음에도 점수가 나쁘지 않게 나와 인서울에 성공했다. 서울 모 대학의 철학과가 가고 싶었지만 낙방했고, 성적 우수자 장학금 준다는 모 대학의 교육학과에 들어갔다.


잡학에 가까운 '교육학'과에서 하나 배운 게 있다면 한국의 공교육 과정이 얼마나 낙후돼 있고 불평등한지였다. 교육학에도 여러 하위 분야가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교육사회학이 제일 재미있었다. 교육사회학의 맑시즘적인 관점에 사로잡혀서 한동안 맑스코뮤날레 학회에도 참석하고 거리 시위에도 나가고 좌파 코스프레를 많이 했던 것 같다. 30년 넘게 저녁 열두 시에 일어나서 낮 열두 시까지 공휴일도 없이 일하셨음에도 왜 우리 집은 가난을 면치 못했을까 라는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게 해준 것이 좌파적인 시각에서 씌어진 교육사회학이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에서의 불평등이 심하기 때문이구나. 6.25 전쟁 이후 사회 계층 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던 교육에서조차 불평등이 심화돼 온 게 사실이구나. 노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힘든 삶을 사셨던 것은 아니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뭔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구조가 썩었다면 그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뭔가 노력해 봐야겠다고 나름 비장하게 다짐했던 것 같다.

자기를 상당히 과대평가했던 시기가 대학생 때였던 것 같다. 과대평가라기보다 스스로가 얼마나 체제 순응적인 인간인지 잘 몰랐다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다. 돌이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좌파적 시각의 글을 당시에 많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움이란 것이 내 삶과 무관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참 소중하다. 배움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대안적 관점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내게 더 어울리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중심으로 삶을 재조직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3 때는 학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으나 정작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학벌보다 '배움을 지속하는 것'이 내게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고, 마음이 흐르는 과정을 내성(introspection)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발달된 감각을 지녔다고 근거없이 판단했기 때문에 심리학을 공부해 보기로 결심하게 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공교육을 통해서는 정작 배운다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 했던 것 같다. 최소한 고3 때는 남들처럼 인서울하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여기며 기계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교 1년 다녀보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뭔 의미가 있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하던 대학생활과 다르기도 했고, 근본적으로 대학생활 역시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일 뿐 먹고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1학년 마친 후 자퇴를 고민했다. 1년 휴학하면서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휴학을 했고, 남들 입대해 있을 나이(22살)에 나는 서울시에 위치한 구립 도서관 및 시립 도서관을 전전하며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1년 동안 거의 300권에 가까운 책을 읽었는데, 그 중 절반이 철학책이었다.(나머지 절반은 맑시즘 관련 사회과학 서적과 밀란 쿤데라를 위시한 소설책이었다.) 이해도 안 되는 철학책을 거의 문자만 읽었던 때도 있다. 뭐든 잡으면 끝을 봐야 했기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이라는 악명 높은 책을 끝까지 독파하기도 했다(내용은 1도 기억이 안 난다. 고구마 뿌리를 비유로 들며 탈중심성에 대해 뭐라고 그랬던 것 같긴 하다).

이 때 읽은 책들이, 설령 이해가 안 돼 문자만 읽은 책도 많다 할지라도, 군 제대 후 복학하여 들었던 교육사회학 수업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복학 후에 앞서 언급했듯이 왜 배워야 하는지 알게 됐고 그 때 얻은 나름의 답을 안은 채 여기까지 왔다.



배움을 얻기 위해 굳이 대학에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썼나 보다. 내가 교육사회학 수업을 통해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그 수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많은 독서와 사람들과의 교류와 사회 경험을 통해 내가 지닌 좁은 시야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아내와 내가 자식 교육에서 미리부터 합의를 본 부분이 있다면, 아이 사교육 보낼 시간에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이 아이에게 유익할 것이란 가정이다. @admljy19님의 생각과 통하는 지점이다. 고3 중 몇 퍼센트나 소위 말하는 SKY에 들어가겠는가. 정말 정말 극소수다. SKY 들어간다고 해서 인생길 펴지나? 저어어언혀 그렇지 못 한 게 사실이다. 학벌과 행복은 유의미한 상관이 없다. 굳이 연구 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인서울 못 하면 계층이 하락하여 고생을 면치 못 할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신념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좋다. 인서울 못 해서 부모님 세대보다 사회경제적 계층이 하락하여 월 200만 원 벌기도 어렵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월 400 벌면 두 배로 행복할까? 행복하기 위해서 일정 수준의 돈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소득이 올라간다고 해서 행복도 비례하여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수많은 변수가 있는데, 이 사회는 그 수많은 변수를 간과한 채 학벌과 돈에만 집착한다. 나는 월 200 벌더라도 이 직업을 유지할 것이다. 월 100 벌더라도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이 직업군에서 벗어난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직업에서의 '배움'이 내 삶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배운다는 것 자체가 행복을 설명하는 주요 변수 중 하나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산을 타는 것 자체가 행복을 설명하는 주요 변수 중 하나일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편의점 테이블에서 캔맥 한 잔 하면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것, 서점에 깔린 신간을 훑어보고 그 중 맘에 드는 책에 잠시 빠져드는 것, 좋아하는 밴드를 보러 홍대 클럽을 찾는 것, 개냥이의 배를 만지는 것, 나만 아는 동네 커피집에서 맛있는 라떼 한 잔 하는 것 등등 행복을 설명하는 저마다의 수많은 변수가 있다. 누군가에게 학벌과 돈은, 행복을 설명함에 있어 개냥이 뱃살을 만지는 것만큼도 못 한 것일 수 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택은 개개인이 하는 것이다. 사회가 학벌과 돈을 행복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삶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차단하고 획일화를 통해 사람들을 보다 손쉽게 착취하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배후 세력이 있고 누군가가 이 모든 과정을 지휘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망상이다. 사실 착취를 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부르주아를 타도하자 같은 외침은 1840년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것인지 판가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난 맑시즘을 선호하지 않으며 푸코의 손을 들어준다. 노동자를 죽이고도 태연히 그걸 덮으려 하는 S같은 기업은 정당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업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거대한 판의 규칙 즉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푸코빠라 에피스테메 인용했는데 잘못된 인용이라 여겨지면 지적바란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 에피스테메를 파고 들어야 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통념이나 질서가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이처럼 의문을 품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넓은 의미에서의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학벌과 돈을 중시하는데 왜 그런 걸까? 언제부터 학벌과 돈을 중시하게 됐을까? 그게 중요하다 한들 그걸 다 얻었을 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뭘까? 학벌과 돈 없이도, 백 번 양보해서 최소한의 학벌과 돈만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내 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한 가지는 바로 이런 태도이다.


공교육을 대체할 만한 현실적 대안이 없으니 초.중.고등학교야 보내겠지만, '아빠 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요 학원 보내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딸을 사교육 현장에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대학을 가는 것의 장단점에 대해 말해 줄 수야 있겠지만, 딸이 대학을 안 간다고 해도 전혀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것이지 나조차도 장담하기 어렵다. 행동에 앞서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다만 계속 이런 지향을 유지하고자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SKY 나와도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지 못 한 인간의 삶은 피폐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이상적인 얘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문을 품고 스스로 답을 구하려는 의지가 중요하고, 이런 의지를 바탕으로 스스로가 행복의 조건을 구성해 나갈 때라야 삶의 풍파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인격이 탄생한다고 믿는다. 공교육이나 사교육 현장에 계신 선생님들 중에도 훌륭한 분이 많을 것이다. 그 분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 분들이 몸 담고 있는 한국 교육 구조는 애석하게도 건강한 인격을 형성함에 있어 0점이다.


배움에 관한 아빠의 개똥철학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배우게 하는 지름길이 있다면,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일 테다. 내일은 선거일이라고 오후 반차가 주어졌는데, 투표는 이미 마쳤으니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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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백배네요. 전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이도 그 나이만큼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키웠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응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일찍 가서 놀아줘야겠어요^^

공감하신 분이 계시다니 글 쓴 보람이 더 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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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덧글을 달아 부담스러우실지도 모르나 글이 참 좋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은 사실 교육격차도 아니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아니고 더 큰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보는데,

기축통화를 주관하는 연준과 강대국들이 세계경제를 쥐었다 놨다 하고 우린 그 와중에 아엠에프도 오고 경제불황도 오고 그들에게 휘둘리니..

이런 세상에서는 대학보다는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법과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더 우선인 것 같습니다.

심각한 덧글 죄송; ㅎㅎ

바로 덧글 달아서 부담스러우실지 모르겠으나 전 이런 심각한 덧글이 좋습니다. ㅎ 저도 교육격차 이전에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는 현상이 선행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세계 경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이런 불균형은 사실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장점이 많았지만 한계에 봉착한 느낌이랄까요. 구조를 바꾸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서 마음이라도 바꿔보자는 심정으로 어쩌면 제가 심리학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정말 끝까지 해보고 싶다면 대학은 필수요건이겠죠. 대학원을 가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학 이외에도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무수한 길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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