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장이책추천해드립니다] 16탄 "인기 없는 에세이"

in #kr6 years ago (edited)

이 책의 관전포인트 중 하나는 윌리스의 서문이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 - 전공자라면 더더욱 - 들에게 철학사를 쉽게 전해주는 사람이 버트란드 러셀이었다면, 그를 대신하여 이 러셀에 대한 소개를 가장 잘 한 사람은 컥 윌리스(Kirk Willis)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근대의 가장 똑똑하고, 말잘하며, 대중적인 동시에 깊이 있는 러셀이란 한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읽어 본 가장 인물평 중 가장 간략하게 요약하면서도, 빠짐없이 그의 태도와 신념에 대해서도 짧은 문장안에 모두 담아낸 윌리스의 서문 때문에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물론 한글로 읽어본 내게 이 책 판본의 번역자, 장성주란 사람의 매끄러운 문체에 반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윌리스는 러셀의 가장 큰 매력을 그의 인생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태도가 늘 변화 - 업그레이드라고 하자 - 했던 것에 찾는다. 러셀의 말 중에 이게 그의 입장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내 신념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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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과정에서도 늘 변함없던 그의 코드, 윌리스는 러셀의 생애에서 항상 직접 뛰어들어서 주장했던 반전에서 찾는다. 오늘날 반전이란 가치는, '안전'을 못챙겨서 바로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보단 ‘안보’가 더 중요하다는 명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몇몇과, “인간이 너무 넘치고 또 문제를 일으키니 자연이 재앙을 주지 않을 경우 인간이 전쟁을 통해 스스로 수를 줄이고 자정작용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란 헛소리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도 말할 수 있는 몇몇 '미지신'들을 빼면, 거의 대부분이 동감하는 가치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00년대 초중반, 바로 저 몇몇의 생각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고, 그 때는 아마 러셀의 전쟁은 안된다는주장이야말로 꿈이나 꾸는 이상주의에 불과한 동시에, 반역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영국귀족의 백작작위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총리집안에서 태어났고 최고지성집단에서 교육받는 자연스러운 혜택속에 있었다는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정치적으로 진보적 태도를 고수했다고 보면, 채사장 말마따나 그는 분명 의리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인류, 철학, 정치, 사조 등의 주제들에 대해 쓴 수필들을 모은 이 책의 제목이 인기없는 에세이란 그냥 지어진 제목은 아니다.



먼저 나온 책에서 ”철학은 본래 지식층 일반의 관심사를 다룬다”라고 적었더니 이말을 갖고 서평가들이 나를 비난했다. 그들이 보기에 내 책에 어려운 내용이 일부 있는데, 저 따위 말로 사람들을 속여서 책을 사게했다는 것이다. 나는 또 이런 욕을 먹고 싶지 않다... 이번책에 아주 드물에 ‘멍청한’ 열살짜리 아이라면 좀 어렵게 느껴질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내 수필들이 인기있는 글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인기없는’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책 제목에 관해 한마디 중


'그냥' '열 살짜리'가 아니라 ‘멍청한’ 열 살짜리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을 비난했던 이들에게 들으란 듯한 이 표현은 러셀의 문체에서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정통을 찌르는 구절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똑똑한 지식인답게 러셀은 결코 감정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100년뒤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공감이 갈 정도의 센스급 삿대질을, 반드시 글 속에서 은근히 보여준다. 물론 러셀과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런 문투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움베르트 에코가 비록 유쾌했지만 난해함 속에서 재미를 찾았던 지식인이라면 러셀은 그야말로 그냥 ‘사이다’다.

그러나 그의 반전운동의 태도는 자신의 편 뿐 아니라 적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자본가를 타도하면 남은 사람들이 영원토록 복을 누릴 것이다.”
”유대인을 절멸시키면 모두가 덕을 얻을 것이다.”
”크로아티아인을 죽이고 세르비아인이 통치하자.”
”세르비아인을 죽이고 크로아티아인이 통치하자.”

우리시대엔 이런 구호들이 널리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코딱지만큼이라도 철학이 있는 것들이었다면 이런 식의 피에 굶주린 헛소리를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 초보자를 위한 철학 중


편을 갈라서 옳은 쪽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게 맞다고 다투는 것은 결국 ‘피의 굶주림’이란 러셀의 정의는 이렇게 명확한데, 최근에도 가끔 어떤 행위나 사건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단순히 이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라고 편 갈라놓고 한쪽을 싸잡아 비난하는 주변의 철학전공자들 - 아주 많지는 않다 - 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선/악과 정의/불의의 판단이 깔끔하게 갈라지고 변치않는 것이었다면 빈틈없는 통계나 산수 - 수학이 아니라 - 가 윤리가 되고 가치관이 되어야지, 철학을 어따쓰나.

러셀의 글이 주는 명확함 혹은 비꼬기 수준은 사실 너무 경박하다고 느낄만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에헴문화나 거룩한 문화가 최우선 사회가치일 때 이야기고, 지금 같이, 헐!이나 대박~같은 감탄사 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감정표현을 가능케 하는 시대에선 오히려 잘 먹힌다.


세상에는 허다한 죄가 있고 그 중에는 저지르면 지옥에 떨어지는 죄도 일곱 가지나 있지만, 사탄의 계략이 가장 쏠쏠한 성과를 거두는 분야는 역시 성이다. ... 최선은 역시 독신주의지만 금욕이란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결혼을 하면 된다. 혼인 관계 내의 성교는 자손을 낳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되는 한 죄가 아니다. 혼외 성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죄이고, 만약 피임 도구를 사용한다면 부부간의 성교 또한 죄이다. 낙태는 죄이다. 심지어 의학적 소견에 따라 산모의 목숨을 살릴 유일한 방법인 경우에도 그렇다. 왜냐면 의사의 소견이 틀릴 수도 있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절한 사람일 경우 반드시 목숨을 구원받기 때문이다.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물론 성문제와 죄, 이에 따른 필수적인 주제인 기독교 교리를 비꼬아서 비판하는 대목이긴 한데, 아마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이다. 그것도 영국 최고집안출신 지식인의 입에서 70년 전에 나온 말치고는 참 대담하지만 사실 러셀의 글에서 이 정도 수위는 패턴에 가깝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서관장이책추천해드립니다 시리즈


#15 ⟪꼬레아, 코리아 -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
#14 ⟪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13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12 ⟪나쁜 장르의 B급 문화⟫
#11 ⟪송 오브 아리랑⟫
#10 ⟪대한민국은 왜? 1945-2015⟫
#09 ⟪육식의 종말⟫
#08 ⟪문명의 충돌⟫
#07 ⟪공부기술⟫
#06 ⟪르 몽드⟫
#05 ⟪이제 당신 차례요, 미스터 브라운⟫
#04 ⟪런던통신 1931-1935⟫
#03 ⟪번역의 탄생⟫
#02 ⟪그레이트 게임⟫
#01 ⟪조선상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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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문구가 많은 책이네요..꼭 사보고 싶은 책입니다^^

@paramil님이 아주 좋아하실만한 책일 것 같습니다^^

에헴문화나 거룩한 문화가 최우선 사회가치일 때 이야기고, 지금 같이, 헐!이나 대박~같은 감탄사 한마디로 수없이 많은 감정표현을 가능케 하는 시대에선 잘 먹힌다.

에헴 문화
헐 문화

아주 재미난 표현입니다.

아핫 고맙습니다. 콕콕 집어내주셨군요^^

대박~ 센스급 삿대질이 궁금해서 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하핫~ @bombom83님 고맙습니다.

이 새벽 책을 읽고 싶은 맘이 팍팍 드는 글
도서 추천 감사합니당~^^

댓글과 리스팀으로 응원합니당~!

bluengel_i_g.jpg Created by : mipha thanks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셔용^^ 감사합니다 ^^
'스파'시바(Спасибо스빠씨-바)~!

@bluengel님 안주무시고 모하십니까? ^^ 이렇게 와주셔서 힘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굿나잇 하셔요~

ㅋㅋㅋㅋㅋ
좀 일찍 자다가 모기 녀석들이 스티이이잉임 스티이이이잉임 하며 괴롭혀
깨어났다가 스팀잇 ㅋㅋ

다행히도 이 시간에는 먹사가 많이 올라오지는 않으니...ㅋㅋ

편안한 새벽 보내셔용~ ^^

bluengel_i_g.jpg Created by : mipha thanks :)항상 행복한 하루 보내셔용^^ 감사합니다 ^^
'스파'시바(Спасибо스빠씨-바)~!

ㅋㅋㅋㅋㅋ

"나는 내 신념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를 보고 제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같아요. 항상 맞다고 생각하고 믿고 실천해오고 있는데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한데요?..ㅎㅎ

@chrisjeong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그말이 얼마나 세게 꽂히던지... 비슷한 걸 느끼셨군요^^ 굿나잇 하십시오^^

Nice read. I leave an upvote for this article thumbsup

군대에서 에세이 많이 읽었었는데 ㅎㅎ 사회에있으니 독서가 어려운..

맞습니다. 살려니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죠... 살기위해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사는건지... 에고...

관장님이 추천도서를 한번씩 쭉 봐도 좋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에빵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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