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단상] 단편_"탈출, 의리같은 소리하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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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높은 훈계는 1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지만, 오늘 오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루에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 단 한시간이었다. 두 시간 말고 단 한시간. 결코 강도가 약하지 않은 일과가 끝나고 잠깐 무릎을 펼 사이도 없이 불시에 소집되었고 익숙했지만 늘 새로운, 경건하고 곧은 자세까지 요구받는, 바른 정신을 굳건히 하는 뭐 그런... 아니 그 따위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두세번 꼴로 돌아오는 비정기적인 시간이었고, 빠지지 않는 것은 늘 충성맹세 같은 것이었다. 배신, 의리. 가장 피해야 했고 가장 지켜야 한다고 배운 두 단어였다. 불편함이 늘 새롭게 반복되었던 건, 그게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륜처럼, 당사자들의 문제였던 것이지 제3자가 다른 제3자에게 그건 나쁜짓이다라고 요구하거나 항변할 그런 가치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말들은 지독히도 정치적이었다. 나름 그곳에서 요구하는 가치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그 충성맹세가 번번히 숨을 막히고 얼굴색을 질리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앞에서 보란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결국 뒤에서 몰래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 섬에서 어떻게 뭍으로 올라올지에 대한 대책은 그 다음에 세워도 늦지 않았다.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섯 번의 탈출시도는 번번히 좌절되었지만 이번엔 정말 성공할 것 같았다. 이전의 시도 중 두 번은 섬을 건널 수 없어서 잡힐거란 걱정에 내발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앞의 두번은 짐을 챙기다가 포기했던 나였다.

항상 즐겨듣던 용기없다는 핀잔을 들을때면 나는 내가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용기를 타고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용기가 없이 태어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용기란걸 타고나지 못했으니 그런 나를 순응하면 그만이었다. 난 그렇게 자책하며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 만큼은 내 몸 속에 있든 없든 그 용기를 짜내야했다.

모든 것이 불야성인 오늘날엔 야반도주란 말이 어색하지만, 아니 불야성이란 말도 어색하군... 어쨌든 난 당시 도망쳤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질 못했으니 비겁했지만, 당당한 내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단 그냥 숨을 쉬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는 걸 한참이야 지나고 알게 되었다. '가슴이 답답하다'든지, 뭔가 '쌓였던 숨을 내쉰다'든지 하는 완성된 말을 떠올리기엔 그 땐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 밤을 뚫고 짧은 다리로 산기슭을 걸어온 나는 이미 3시간 반을 쉬지 않고 뛰다시피 걸었다. 벌써 발가락엔 물집이 잡혔고 그것들이 눌릴 때 마다 너무 화끈거렸다. 그러나 예전처럼 도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너무 멀리왔고, 또 먼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에 잠들어있던 때가 없기에 그 먼동은 익숙했지만 발바닥과 발가락이 화끈거리는 도중에도 그 먼동은 새로웠다. 뭔가 내 삶 앞에 새로운 것이 시작될거란 걸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5시다. 꼭대기에선 아마 지금쯤 내가 없어졌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잠궈놓고 나온 내 방문을 두드리고 있을 수도 있다. 아직 부수지 않았다면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거라고 여기며 계속 문을 두드리겠지. 문을 잠궈놓고 올 생각을 한 건 잘한 일이다. 나는 나름대로 영악했던 것 같다.

강기슭에 사는 젊은 토박이 아저씨는 50대 후반쯤이었는데 - 지금 생각해보면 훨씬 더 어린 사람이었을 것 같다. - 가끔 산 위에 오토바이로 물건을 가져다줄 때 보면 좀 모자란 것 같았지만, 또한 그렇게 순박한 사람도 아니었다. 생긴건 참 잘생긴 사람이었다. 아니면 좀 모자란척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볼 때마다. 이상한 방법으로 삥을 뜯곤 했다. 그는 세 명은 모여야 강을 건네주곤 했는데, 맨날 그 낡아빠진 자신의 배 - 왠지 훔쳤을 것만 같은 - 를 수리하고 기름같은 걸 부어가며 닦는걸 몇 번 봤다. 한 사람에 5천원자리 한장을 받고 가니 왕복이면 3만원 정도를 벌 수 있는데 두 명이면 아무리 급해도 3인분을 내야 배를 출발시키곤 했다. 아마 내가 동네에 잘 못내려와바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배 아저씨를 ‘날라리 사기꾼’이라고 수군 거리는 소리는 늘 듣던 터였다.

어쨌든 그 아저씨 배를 타야했다. 어린 내가 들고 있던 낡은 캐리어 - 지금 생각해도 대체 그 캐리어는 어디서 났던 걸까 늘 궁금하다. - 를 끌고 새벽에 온 몸이 흠뻑 젖어서 쩔뚝거리는 나를 본 배 아저씨는 결코 호의적이 아니었다.

“너 수련원 꼬맹이 아냐, 이 시간에 우짠 일이고? 그 가방은 뭐야?”

뭐라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나는 강을 건네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하며 수련원에 전화해봐야겠다며 검은색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는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힘이셌다.

“알았다 일단 놔바... 놔 보라고. 10만원 내.”

소공녀에 나오는 가게 주인의 말도 안되는 생트집이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내겐 그 돈이 있었다. 과자상자에 7-8년을 모은 32만원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돌아서서 나는 10만원을 꺼냈다. 5천원짜리 20장. 낡았지만, 이미 몇년을 꺼내보길 반복했던 가진돈의 삼분의 일을 나는 날나리 사기꾼 어른한테 빼았겼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치 비비를 사냥하는 표범같은 사나운 눈빛으로 그는 돈을 낚아채며 예상치 못한 돈을 갖고 있는 내게 놀라는 눈빛을 감췄다. 생각해보면 나머지 돈을 빼앗아가지 않은 건 의리였을까. 그리고는 하루 일을 쉬어도 될만큼의 돈이 생겨서인지 제법 서둘러 기둥에 줄을 풀어 노로 배벽을 탁탁치며 고개짓으로 나를 태웠다. 그렇게 재빠른 동작으로 움직이면서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아침부터 뱀이 나올 것 같았다.

노를 30분쯤 저어야 뭍이 나오는 그 섬으로부터 강을 중간쯤 지나왔을 때야 나는 어깨에 바짝 들어간 긴장감을 좀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합창하기 시작하는 새소리만 빼면 강물은 정말 노을질 때 금빛 물결만큼이나 조용했다. 아, 물론 색깔은 짙은 시퍼런 색이라 전혀 낭만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시야가 멀어지는 섬을 보며 나는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벗어났다는 자유의 기쁨도 아니었고, 더구나 그곳이 그리워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단 한 번도 혼자서 빠져나와보지 못했던 그 곳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정을 붙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발 디디고 살던 그 섬과의 이별이 그토록 서러웠던 것 같다. 빌어먹을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어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모두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전제를 달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호의나 애정 따윈 없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다.

“야! 뭐하는거야?”

친구가 옆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볼륨이 커지는 느낌이 확 든다. 7월 14일. 불꽃놀이가 있는 날이다. 2시간 동안 쉴 새없이 하늘에 꽃과 별이 뜬다. 대포소리가 난다. 불꽃놀이 구경와서 호텔은 기가막힌 곳을 잡았다. 불꽃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사방에 앰뷸런스 소리, 함성소리, 휘파람 소리 가득한 불꽃놀이 앞에서 나는 갑자기 과거를 소환했나보다. 휘파람 소리가 배를 젓던 날라리 사기꾼 아저씨의 휘파람 소리와 오버랩되었다. 갑자기 소환된 회상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순식간의 시간이었다. 내가 과거의 현장에 있지 않음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순식간의 기억은 너무 강렬한 것이어서 그 1분의 시간이 좀처럼 떨쳐내지지 않았다. 혼자서 침대의 푹신한 이불을 덮어쓰고 창과 반대로 돌아누워서 생각해 잠긴다.

그 시절은 내가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을 했던 첫번째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도 내가 몸담고 있던 곳에서 몇 차례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을 감행했다. 생각해보면 짧은 인생에서 나는 수 없이 그 배신이란 나쁜짓을 반복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내 인생이 배신의 역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의리를 지키며 살아야 했을까.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말했던 의리나 배신같은 건 참 중요한 가치임엔 분명했지만 내 인생을 걸어가며 지킬만 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 인간들이 내게 했던 걸 떠올리니 나는 배신하길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내가 존재하는 곳이 지금, 여기라는데 긴장섞인 안도감이 밀려온다. 내 인생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내가 결정해야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굳혀지는 동시에 지들 맘대로 의리니 배신이니 내 희생을 강요하며 그게 옳은 거니 넌 지켜야 맞아라고 주장하는 형편없는 어른들이 떠오르며 욕지기가 꾸역꾸역 올라온다.

“지들이 조폭이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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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란게 참 힘든일인데 대단하십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글들은 있네요~

아웅 집사님 감사합니다^^ 부끄럽습니당^^

작가이신가 봅니다.
멋진 작품 잘 읽었습니다.

작가 흉내내고 싶은 1인이죵. @dozam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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