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in #kr6 years ago





사랑의 종류, 관계의 방식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오쟁은 헤테로 시스젠더이에요?" 네?.... 아? 음?? 아니 이게 무슨 테헤란로 식스센스같은 말인가? 눈을 몇 번 꿈뻑거린 후에야 그 외계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 그리고 타고난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것을 시스젠더(Cisgender)라고 한단다. 한마디로, "너는 여자 좋아하는 남자야?" 라고 묻는 것이었다. '당연한' 질문을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것일까. 질문자의 의도는 확실했다. 세상엔 수많은 성별과 성적 지향이 있어. 그렇기에 (혹시라도)너의 당연은 당연히 당연하지 않아!


권력은 이름이 없다. 세계의 '기본값'은 너무 '당연해서' 굳이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수식과 이름은 언제나 소수자에게 주어진다. 대표적으로 '여배우'라는 말은 있지만 '남배우'라는 말은 안쓰인다. 저기, 그때 말했던 그 남대생 너무 멋지지 않아?.. 아니 그 남교사가 말이야.. 어제 봤던 작가는 남류화가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뤘지!.. 라고 말하면 대단히 어색하다. 남자가 '세계의 기본값'이기 때문이다. "오쟁은 헤테로 시스젠더이에요?" 라는 질문은 '기본값'에 이름을 붙이는 저항이다. 당연했던 이성애 중심의 기존 권력을 부분화, 맥락화시킨다. 이로써 남자인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단지 하나의 방식으로 인식되는, 건강한 추락을 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에서 "자연은 허용하고, 문화는 금지한다." 라는 멋진 문장을 유발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들은 사실 문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내가 어릴때 교과서에서 배우고 문화적으로 습득한 '가족'의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거기에는 다문화가정도 없고 미혼모 가족도 없으며 동성애 부부의 가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는 기본값을 철저하게 습득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존재'란 말은 틀렸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 자체로 자연이다. 이미 있는 존재를 부정한다면 범인은 자연이 아니라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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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나 연애는 어떨까?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뜻하는 '폴리아모리'의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모노아모리(유일함을 의미하는 mono와 사랑을 의미하는 amory)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 당장 폴리아모리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증거를,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심지어 나쁘다는 이유를 수백가지 제시할 것이다. "나는 절대로 못해!" 라고 외치면서, 사회에 결코 전염되어서는 안 될 메르스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 사람들 중에 일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수도 있겠다'라고 애매하게 표현한 것은, 내가 앞으로의 모든 연애와 사랑을 고정불변한 하나의 규칙(정상사랑 이데올로기 : 모노아모리)을 정해서 수행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기도 하다. 나는 '현재' 폴리아모리도 아니고 모노아모리도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헐, 대박.. 걔.. 미친거 아냐? 그게 사귀는 거야?" 라는 뒷담화를 담담하게 들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내 연애관은 조금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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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덧대기
<우리는 폴리아모리한다> 책은, 주제 자체가 접하지 않았던 내용이라 신선하긴 했지만 들뢰즈, 가타리, 스피노자 등등.. 기존에 권위있는 철학자의 개념을 너무 끌어다쓰려는 기획 의도가 책을 전체적으로 노잼으로 만들어버렸다. '언어 없는' 소수자의 존재 방식을 세상이 인정하는 굳건한 개념을 빌려 언어화시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느끼긴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심정이야 백번 이해가 갔지만..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라는 마음도 든 것은 사실이다. 폴리아모리에 관한 텍스트는 예전에 페북에서 홍승은 씨의 본인 경험담을 담은 글이 굉장히 실감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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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부부의 연을 맺는 일부일처제를 채택하는 나라이다. 이러한 문화에 대하여, 학자들은 유일함을 의미하는 Mono와 결혼 제도를 의미하는 Gamy를 합성하여 모노가미 Monogamy라고 지칭한다. 폴리지니, 폴리안드리, 집단혼 등이 통용되는 문화를 통틀어 폴리가미 Polygamy라 부른다. 폴리아모리는 여럿을 의미하는 접두사 Poly와 사랑을 의미하는 명사 Amory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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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 커뮤니티에서 컴퍼션은, 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서 연애적이거나 성애적인 관계를 통해 행복을 느낄 때 자신 또한 행복을 느끼는 그 감정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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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문어발은 폴리아모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문어발은 폴리아모리일 수 있지만, 모든 폴리아모리가 문어발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어발이란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다수의 상대들을 모두 자신만이 독점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다자연애자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저 '여러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노아모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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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이든 간에, 자연에서 사랑을 느끼는 일이란 그 자체로 기쁜 일이다. 하지만 문명은 그러한 정서를 단 하나의 대상에 대한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거기에 죄책감이라는 조미료를 투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모호한 윤리적 감수성을 자극했다. 쉽게 말해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고 저렇게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어떤 결합 관계를 맺는 게 가장 적절할지에 대한 구성적 상상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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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와 보부아르 부부의 유명한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로맨틱한 생활에 대해 남김없이 솔직하게 말할 것. 둘째, 배우자에게 다가운 새로운 사랑에 대해 제약하지 말 것, 셋째,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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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쓴 책을 여기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설레기도(?)하고...^^ 졸업후 책 냈다고 인사 와서 받아들고 처음 읽었을 때 제 느낌도 오쟁님 느낌과 비슷했네요.ㅎㅎ


"<우리는 폴리아모리한다> 책은, 주제 자체가 접하지 않았던 내용이라 신선하긴 했지만 들뢰즈, 가타리, 스피노자 등등.. 기존에 권위있는 철학자의 개념을 너무 끌어다쓰려는 기획 의도가 책을 전체적으로 노잼으로 만들어버렸다."

오홋! 세상 좁네요 ㅎㅎㅎ 폴리아모리 관련 책이 찾아보니까 몇 권 없더라구요. 제자 분이 큰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

공저자 중 한 명만 제 제자인데요.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아쉬움도 많습니다. 워낙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한 분야라 용기는 평가하나 그런 만큼 현실 안팎에서 공부를 조금 더 단단히 하고 책을 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차마 제자한테는 말을 못했습니다. ^^;;;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아내가 바랐던 것 아닌가요 ㅎㅎ

영화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아내도 자신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다자연애를 권유했던가요? 가물가물..

사르트르의 합의 내용에서 첫번째가 어떻게 보면 관계파탄의 원인이 될 것 같지만, 어느 지점을 넘는 순간 사실상 유대관계를 지속시키는 조항에 가장 가깝다라고 생각을 했었죠. 물론 대부분 실천은 잘 안될 듯...

저도 읽으면서 폴리아모리 관계를 상상해봤는데,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긴 하더군요. 관건은 질투의 감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것 같은데.. 이건 정말 닥쳐봐야 알 것 같고 그 지점을 넘기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주변에 폴리아모리 친구가 워낙 자신 성향 말하면 소스라치는 사람이 많아서 그냥 지옥의 폴리아모리라고 소개하고 다니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ㅋㅋㅋ 근데 진짜 그러고도 잘살 친구들은 잘살기에... 머 나름 세상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듭니당
근데 첨엔 폴리아모리 개념 들었을때 뭐야 그거 걍 다자연애 아니냐 하고 말았는데 밀접하게 얘기해보니 어어... 정말 그쪽인 사람만이 이해할수 있겠더라구요.. 단순한 다자연애인게 아니라 꽤 복잡하더란 것입니다.... 하기사 단순한 다자연애는 말이 좋지 그냥 공식적으로 바람나는거랑 다를바가 없어서... 미묘하게 다른데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뭐 그냥 서로서로 잘살면 그만인 것이겠지요

오.. 저도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네요. 궁금한 것도 많고 ㅎㅎㅎ 저는 폴리아모리를 뜻하는 '비독점적 다자연애'에서 사실 사람들의 많은 관심이 쏠리는 '다자연애'쪽은 별 관심이 없고, 저는 오히려 '비독점적' 에 관심이 많아요. 티븨님 말대로 서로서로 잘살면 그만인 것이라 다들 잘 살려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ㅎㅎ

Polyamory / open relationship 관련해서는 "The Ethical Slut - Hardy" 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Monogamy 같이 통속적 관계를 벗어나는 여러 형태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여러 예가 나와있어서 교육적이면서도 책 내용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을 하면 좀 두리뭉실하고 안와닿는 얘기도 많을 수 있는데 이 책은 현실적인 눈높이에서 씌여져서 평소 폴리아모리 집단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 - 공유의 방식, 가정의 형태, 육아 방식 등등 - 이 이 책을 보고 많이 풀렸네요. 추천드려요.

이 책은 나온지 10년 가까이 되서 원문으로는 써드 에디션까지 나왔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한글판은 나오지 않은거 같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영어 까막눈이라 번역된다면 한번 기웃거려봐야겠네요 :)

자식이 둘일 때 점점 필요성이 커지고, 셋 이상이 되면 절실히 느끼게됩니다. 부모는 2명이 아니라 3명 또는 그 이상이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죠. 물론 저도 '질투'라는 감정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만 '가볍게' 해봤습니다.

공동육아에 관한 부분도 책에 나왔던 것 같아요. 폴리아모리를 문화적으로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부족 사례가 나왔는데, 그 문화에서는 애인만 비독점인 것이 아니라 자식도 마찬가지더군요. 모두의 자식이지 '내 자식'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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